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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와 의사가 서로 믿고 의지하는 힘은 과연···
김정한 교수(건국대병원 소화기내과)
[ 2019년 11월 04일 05시 25분 ]

[기고] 의사와 환자 관계는 돈독할수록 좋은 것 같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환자 희로애락에 공감하고 아픔을 함께하는 멋진 열혈 의사의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생명과 직접 연결되는 중한 질환일수록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로서는 모든 환자의 희로애락에 공감하기엔 너무 힘들어 스스로 버티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고 만다.
 

실제로 그 무게감을 견디지 못해 그만두고 다른 길을 찾아 나서는 의사들도 종종 있다.
 

얼핏 냉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환자와 의사 관계는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정도에서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하는 것이 보다 객관적인 상황 판단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도 사람인지라 왠지 정(情)이 더 가는 환자가 있기 마련이다. 오랫동안 진료를 받아온 환자일수도 있고 의사 판단과 치료에 전적으로 믿고 따라주는 환자일 수도 있다.
 

역으로 말은 참 안 듣는데 예약된 날짜에 꼬박꼬박 와서 “그동안에도 술 못 끊었어요” 하고 미안해 하는 ‘웬수’ 같은 환자도 있다.
 

지금 생각나는 환자는 이런 분들 중 한분이다. 2011년이니 거의 10년이 되어가는 기억이다. 50대 중반 여성 환자가 다른 병원에서 시행한 복부초음파에서 간(肝) 종괴가 발견돼 방문했다. B형간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특별히 관리 없이 지냈다고 한다.
 

이런 경우 일단 머릿속에 경고등이 켜진다. B형간염인데 관리 없이 지내다가 발견된 간 종괴라, 십중팔구 ‘간세포암’ 흔히 말하는 ‘간암’이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초기는 아닐 것이다.
 

복부를 비롯해 그와 혈액 등 필요한 검사를 진행했다. 상태는 심각했다. 다발성 간암, 즉 간에 여러 개의 암 덩어리가 보이는데다가 간에 혈액을 공급하는 간문맥까지 침범했다. 다른 장기로의 전이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3기에 해당하는 상태였다.
 

모든 암은 초기에 발견해서 수술 등의 방법으로 제거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이런 경우는 그런 시기를 놓친 경우다. 간문맥이 완전히 막혀서 차선책인 간동맥화학색전술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표적치료제인 sorafenib도 간기능이 양호해야 쓸 수 있는데 간 기능도 그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참고로 만성 B형간염의 경우 아무리 상태가 안정적이어도 최소 6개월에 한번 정기검진을 권고한다. 간세포암을 조기 발견해 치료시기를 놓치지 않고 B형간염 치료시점을 정확히 판단하기 위해서다.
 

평소 B형간염에 대한 관리 없이도 잘 지내왔다고 생각했던 환자는 충격이 컸으나 상황을 받아들이고 치료를 시작했다.
 

B형간염에 대한 항바이러스제 치료를 시작하고 간동맥을 통해 주기적으로 항암제를 투여하는 간동맥 화학주입 술을 시도했다. 필요에 따라 방사선 치료도 병행했다. 간세포암과의 지리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완치를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의 목표는 암이 더 퍼지지 않게 하고 욕심을 낸다면 암의 크기를 줄이는 것이다. 그 과정은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과도 같다. 끝내 이기기는 힘든 상대임을 알고 하는 싸움이다.
 

의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간세포암은 난치성으로 분류된다. 국내 암 사망률 2위에 해당된다. 초기에는 반응이 있었지만 조금씩 암세포가 퍼져 나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속도를 늦추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과정에서 환자가 지치는 것은 당연했다. 어느 날 환자가 나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계속해야 하는 걸까요. 결국 암이 커지는 것을 막지는 못하고 생명만 조금 더 연장하는 것인데···”
 

나는 대답했다. “생명 연장이 필요 없는 건가요? 가족들과 조금 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소용없는 일인가요? 완치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더 얻어진 시간동안 가족들과 못해본 것이 있으면 하세요. 소중한 시간이지 않습니까? 사람이 할 수 있는 노력은 최대한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겨야죠”
 

그 다음부터 환자가 마음을 다잡은 듯했다. 항암치료를 받으러 오는 때를 제외한 시간에는 가족들과 가까운 곳으로 여행도 다니고 즐겁게 지내려고 했다.
 

병원에 남편 분과 올 때도 있었고, 딸들과 올 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자랑했고 힘든 치료도 밝은 표정으로 받았다.
 

치료를 시작한지 2년 가까이 지난 후 결국 더 이상 항암치료를 할 수 없는 때가 오고 말았다. 암세포가 간을 점점 더 잠식해 제 기능을 하는 간이 줄어들었고 항암제 자체가 감당이 되지 않는 상태가 됐다.
 

간성혼수에 빠져 의식을 잃는 일도 생겨났다. 진행된 암에서 치료를 중단하면 평균적으로 남은 시간은 6개월이라고 이야기한다.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말을 해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환자는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간성혼수까지 온 상황이었고, 치료기간 동안 병의 경과를 이미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항암치료는 중단하고 항바이러스제와 간장보조제만 유지하기로 했다. 증상에 대한보존적인 치료만하고 정기적으로 보기로 했는데, 병원에 올 때마다 쇠약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환자는 여전히 가족들과 최대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딸들과 단풍구경을 다녀왔다는 자랑도 하면서.
 

그러다 병원을 옮기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봐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앞섰다. 마지막 진료일에 남편 분은 나를 따라 병원을 옮길까 고민했다.
 

그러나 환자는 웃으며 말했다. “그 동안에도 너무 잘 봐주시고 수고 많으셨어요. 다른 교수님께서 잘 봐주실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감사했습니다”
 

병원을 옮기고 소식을 듣지 못하다가 1년쯤 후 옛 동료를 만나 환자에 대해 물어봤다. “그분, 교수님 떠나시고 나서 두 달 후에 돌아가셨어요. 기운이 빠지셨나 봐요”
 

기운이라는 말 자체는 과학적이지 않지만 왠지 믿고 싶어지는 단어다. 의사와 환자사이의 믿음과 신뢰라는 것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기댈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환자가 의사를 믿고 따라주는 만큼 의사도 환자에게 의지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 환자를 의지했던 것 같다. 보존적인 치료만 하기로 한 후 1년이 넘게 생존했던 것은 아마 서로에게 의지하는 어떤 힘이 작용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dailymedi@daily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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