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로가 일상인 대한민국 의사들
‘주 52시간 or 특례업종’ 대학병원 딜레마
2019.04.24 06:42 댓글쓰기

[데일리메디 정숙경기자. 기획 5]고인들의 희생은 의료계에 적잖은 충격을 던졌다. 특히 국립중앙의료원 윤한덕 응급의료센터장은 의료계에 만연한 ‘피로사회’의 심각성을 각인시켰다.

격무에 시달리다 본인의 집무실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 그의 사연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의사들의 고된 삶을 되짚어 보게끔 했다.

그럼에도 의료계 종사자들의 피로도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정부가 워라벨(Work & Life Balance)을 기치로 도입한 주 52시간 근무제 역시 병원계에서는 아직 공회전만 거듭하는 모습이다.

병원계, 양자택일 갈림길
정부는 지난해 7월 기존 주 68시간이던 근로시간을 52시간 으로 줄이는 근로기준법을 전격 시행했다. 근로자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한다는 취지였다.

다만 상시근로자 300인 이상 사업장은 2018년 7월 1일, 50~300인 미만은 2020년 1월 1일, 5~50인 미만 사업장은 2022년 7월 1일부터 단계적으로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병원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노동집약적인 병원산업 특성상 300인 이상 근로자가 재직 중인 병원들은 주 52시간 준수 의무가 부여됐다.

다만 생명을 다루는 병원은 특례업종으로 분류돼 주 52시간 근무제 적용에서 제외될 수 있도록 했다. 중요한 점은 이를 위해 ‘노사 합의’라는 전제가 달렸다는 사실이다.

의사나 간호사, 의료기사 등 보건업 종사자의 경우 노사 서면합의가 있어야 주 12시간 초과 연장근로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뿐만 아니라 노사 합의로 주 52시간 근무제 특례적용 사업장이 됐더라도 연속 근무 중간에 11시간 이상의 휴게시간을 무조건 보장토록 했다.

즉 주 52시간 근무제를 도입하든지 아니면 노사 합의를 통해 특례업종을 적용받든지 양자택일 상황에 놓인 셈이다.

병원들은 고심에 빠졌다. 주 52시간 근무제를 택하자니 인력 충원에 따른 인건비 부담이 만만찮고, 특례업종으로 가자니 노조와의 험난한 협상이 우려됐다.

특히 노조와 합의를 통해 특례업종 적용을 받더라도 ‘11시간 휴게시간 보장’이라는 난제를 해결해야 하는 만큼 무작정 특례를 취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병원들이 고민을 거듭하는 사이 주 52시간 근무제 위반 기업에 대한 처벌 유예기간이 도래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개정된 근로기준법을 시행하면서 연말까지 처분을 유예하기로 했다.

하지만 일선 병원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제도 정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업장이 있다고 판단해 2019년 3월 31일까지 유예기간을 연장하기로 했다.

병원들 입장에서는 ‘3개월’이란 시간을 더 벌게됐지만 이 마저도 이제 얼마남지 않았다. 오는 4월부터는 근로기준법 위반 사업장에 대한 처벌이 가능해진다.

주 52시간 근무제를 위반한 사업주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받는다.

상급종합 42곳 중 15곳 ‘합의’
그렇다면 일선 병원들은 어떤 상황일까? 데일리메디는 전국 42개 상급종합병원 전수조사를 통해 대형병원들의 주 52시간 근무제 대응 상황을 파악했다.

조사결과 노사 합의를 통해 특례업종 적용을 받은 곳은 15개에 불과했다. 나머지 25개 병원은 아직 합의를 이루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강북삼성병원, 경북대병원, 고신대병원, 대구가톨릭대학병원, 분당서울대병원, 서울성모병원, 서울아산병원, 순천향부천 병원, 순천향천안병원, 아주대병원, 인천성모병원, 전남대 병원, 충남대병원, 한림대성심병원, 화순전남대병원 등은 주 52시간 근무제에서 자유로워졌다.

이들 병원 중에는 근로기준법 개정 전부터 특례업종에 관한 노사 합의를 연장시킨 곳도 있고, 일부는 이번 개정에 맞춰 새롭게 합의를 도출한 병원도 있었다.

서울 소재 A대학병원 관계자는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 전에도 특례업종을 적용받고 있었던 만큼 노조와 합의를 통해 연장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다만 이들 병원의 경우 근무시간 준수 부담은 덜었지만 ‘11시간 휴게시간 보장’이라는 원칙을 수행해야 하는 만큼 추가 인원 충원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실제 이들 대부분은 지난해 하반기 대대적인 인력 충원을 시행했다. 비중은 의사나 간호사 보다 방사선사 등 의료기사 직능이 월등히 높았다.

기존의 근무 시스템으로는 연속근무 후 ‘11시간 휴게시간 보장’에 차질이 불가피하다고 판단, 상황이 급한 직능을 중심으로 충원했다.

노사 합의에 실패한 병원들은 상황이 상이하다. 특례업종 적용을 위해 노조와 협의를 희망하는 곳도 있지만 아예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을 결심한 곳도 상당수다.

경기도 소재 B대학병원은 “근로기준법 시행 이후 노조와 협의를 진행했지만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며 “일단 급한대로 52시간 근무에 맞춰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산 소재 C대학병원 관계자는 “어차피 가야할 방향이라면 힘들더라도 결단을 내려야 한다”며 “지난 연말 이후 주 52시간 근무제를 가동 중”이라고 전했다.

전북 소재 D대학병원 관계자는 “특례업종을 적용 받더라도 11시간 이상의 휴게시간 보장을 준수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며 “주 52시간에 맞춰 인력을 충원했다”고 밝혔다.

“의료 특수성 감안해 정책 유연성 절실”
병원계 일각에서는 의료라는 특수성을 감안해 탄력적인 법 적용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혈관조영실, 신장센터, 장기이식센터, 내시경실 등을 응급으로 운영하는 병원의 경우 정상적인 근무시간 외에 환자 발생시 문제가 생긴다.

의사, 간호사 또한 이들 부서를 지원하기 위한 임상병리 및 영상의학 등의 부서는 11시간 연속 휴식시간 부여로 다음날 정상 근무가 불가능해 지는 상황이 고려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응급환자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연장근로가 이뤄질 수 밖에 없는 의료현장 대해 배려가 없는 법 개정이라는 주장이다.

특히 메르스 사태와 같은 국가재난 및 이에 준하는 대량의 감염병 환자가 발생할 경우 일시적인 업무량 폭주로 주 52시간 준수는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

게다가 지역 내 화재사고, 건물붕괴, 산업재해시 해당병원 에서는 관련 분야 의료인력이 특정기간 동안 집중적인 진료에 참여하는 사태는 빈번히 발생할 수 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법의 잣대에서 질병치료를 하려한다면 불가피한 상황들로 인해 환자는 결국 불편과 안전 사각으로 내몰려질 수 밖에 없게 된다는 의미다.

근로기준법 준수를 위한 비용 부담도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실제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전국 국립대병원이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을 위해 126억원이 필요하다는 추계가 이를 방증한다.

한 중소병원 원장은 “주 52시간 도입에 따른 인건비 증가 부담은 고스란히 병원이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라며 “메르스 사태 등 아쉬울 때는 병원을 찾고 평상시는 날선 잣대를 드리우는 정부 행태가 문제”라고 일침했다.

이에 따라 병원계에서는 특례업종과 무관하게 직종이나 부서에 따라 불가피한 사례에 대해서는 예외적용을 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연속 휴게시간 11시간 적용 예외 뿐 아니라 6개월 내지 1년의 충분한 기간 내에서 노사 자율에 맡겨 합리적이고 탄력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유연근무 도입을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다.

한 병원계 인사는 “근로자의 저녁이 있는 삶과 워라벨도 중요하지만 생명을 다루는 병원에 대해서는 충분한 대화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정책의 유연성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위 내용은 데일리메디 오프라인 봄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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