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 갈등이 1년 넘게 이어지면서 남은 의료인력으로 버티던 진료현장 곳곳에서 빨간불이 켜지고 있다. 의료진 번아웃(Burnout)에 따른 셧다운(Shutdown) 우려가 커지는 상황이다.
전공의가 떠난 자리를 교수 등이 야간 당직을 늘리며 가까스로 메워왔지만 이들마저 임계점에 달하면서 이직이나 휴직이 잇따르고, 그로 인한 진료 중단 사례가 급격히 늘고 있다.
특히 지방 대학병원들을 중심으로 이뤄지던 ‘진료 제한’ 조치가 이제 수도권 대학병원으로 확산되면서 사상초유의 의료대란 우려감을 키우고 있는 모습이다.
의료진 과부하 조짐은 응급환자가 병원에 처음 도착하는 문턱인 응급실에서부터 뚜렷하다.
지난해 의정사태 초기 응급의료 대란이 발생하자 정부는 파격적인 수가 인상 조치로 급한 불은 껐지만 전공의 미복귀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다시금 재현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실제 세종충남대병원은 최근 격일로 적용하던 성인 응급실 야간진료 제한 조치로 전일로 확대했다. 의료진 부족에 따른 조치로, 당분간 오후 6시부터 오전 8시까지 운영이 중단된다.
강원대병원도 최근 전문의 인력 부족으로 야간 시간대 성인 응급실 운영을 중단했다가 현재 정상진료 중이다.
전남대병원과 조선대병원도 응급실 운영이 한계에 봉착했다. 의료현장에선 내달 초 응급실과 수술실 중 일부가 멈추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실제 전남대병원의 경우 지난해 2월 의정 갈등이 시작된 후 전임의들이 전공의들의 빈 자리를 메워왔지만 이달 말 재계약 만료일 도래를 앞두고 병원을 떠날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대학병원들의 진료기능 마비가 비단 지방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서울의 주요 대학병원들도 응급실 운영 등에 차질을 빚고 있다.
빅5 병원 중 한곳인 서울성모병원은 최근 의정 갈등 장기화에 따른 인력난으로 야간과 휴일 심근경색 등 초응급질환 시술을 제외한 심혈관계 응급 환자 진료를 일시적으로 중단했다.
서울성모병원은 재진 환자들을 대상으로 ‘순환기내과 의사 부족으로 지난 10일부터 당분간 야간과 휴일에는 응급실 순환기내과 당직의사가 부재하다’고 문자로 안내했다.
의정 갈등으로 순환기내과 교수들은 기존에 전공의들이 주로 맡았던 수술 후 중환자 관리까지 담당하면서 피로도가 높아졌고, 급기야 정상진료가 어려워진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대목동병원은 전공의 부족으로 일부 시간대 응급실 운영을 축소했다. 의정사태 이전에는 하루 60명 이상의 응급환자를 진료했지만 지난해 9월에는 운영 중단 위기까지 내몰린 바 있다.
가까스로 의료진 확보에 나서면서 지난 연말부터는 모든 응급실 운영이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780병상 규모의 상급종합병원인 한림대성심병원 역시 최근 순환기내과 교수들 절반이 사직하면서 외래진료 예약 불가 상황에 직면했다.
한림대성심병원 순환기내과 교수는 총 5명으로, 이 중 1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홈페이지를 통한 외래진료 예약이 불가능하고, 별도 전화예약도 받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의정갈등 사태 장기화로 인한 의료진 이탈이 가속화 되면서 앞으로 비상진료 체제 유지도 어려운 대학병원들이 속출할 것이라는 점이다.
전임의와 교수들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근무 여건이 나은 병원으로 이직하면서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앞으로가 더 큰 고비’라는 진단이 나오는 상황이다.
실제 의정갈등 사태 이후 상급종합병원 의사 수가 총 8796명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전공의를 비롯해 이들 공백을 메우던 전임의, 교수 등 전문의 수 감소가 확연하다.
데일리메디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를 분석한 결과 상급종합병원 47곳의 의사 수는 2023년 12월 2만4336명에서 1년 만에 1만5540명으로 8796명(36.14%) 감소했다.
줄어든 인원은 병원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상급종합병원 1곳 당 평균 187명의 의사들이 사직한 것으로 파악됐다.
한 대학병원 교수는 “전공의 공백을 메우던 교수들도 이제 피로도가 극에 달했다”며 “최근에는 교수들 이탈도 이어지고 있어 현장 상황은 더욱 암울하다”고 토로했다.
이어 “이 사태가 지속된다면 남은 인력들은 결국 번아웃에 내몰리고 말 것”이라며 “대학병원들의 진료기능 상실은 가파르게 확산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