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혼 배우자에게도 환자 대신 진단서나 검안서 등을 교부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에 의료계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사실상 혼인관계 여부를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 판단기준이 없는 상황에서 섣부른 진단서 발급으로 일선 의료기관들이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의 중심에 설 수 있다는 우려다.
앞서 더불어민주당 김정호 의원은 환자가 사망하거나 의식이 없는 경우 사실상 혼인관계에 있는 사람도 환자의 진단서, 검안서 등을 교부받을 수 있도록 하는 의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현행 공무원연금법, 군인연금법, 산업재해보상보험법 등 다른 법률에서는 배우자 범위에 사실혼 관계자를 포함하고 있는 반면 의료법에는 명시돼 있지 않다.
때문에 이들이 사망진단서 등을 발급 받아 유족연금을 신청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유가족 협조 없이는 신청이 어려운 실정이다.
김정호 의원은 이러한 사실혼 관계자의 고충을 반영해 의료법에도 배우자 범위에 포함시켜 제증명서 발급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취지로 법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의료계는 사실혼 관계의 모호성과 법적 효력을 가진 제증명서의 민감성을 감안할 때 의료현장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며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의료계 양대단체인 대한의사협회와 대한병원협회 모두 해당 법안의 문제점을 지적한 의견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대한의사협회는 개정안이 현실적으로 여러 문제점을 야기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특히 개인정보 침해와 의료기관의 과도한 부담을 주요 반대 이유로 들었다.
의협은 “사실혼 관계를 인정받기 위한 혼인의 의사와 부부 공동생활의 실체라는 두 가지 요건이 모호해 의료기관이 객관적인 사실 확인 및 판단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의사가 정당한 사유 없이 진단서 교부를 거부할 수 없는 만큼 불확실한 사실혼 관계를 주장하며 교부를 요구할 경우 의료기관이 곤란에 처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제증명서는 상속, 장례, 보험 등 다양한 법적 효력을 갖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혼 배우자로 교부 대상을 확대하는 것은 개인정보 및 사생활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특히 진단서 등의 작성 및 교부 주체는 의료기관이므로 법적 분쟁 발생 시 민‧형사상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의협은 “현행 의료법이 환자 진료기록 열람 및 교부를 엄격히 제한하는 이유는 개인 진료기록이 헌법상 보장받아야 할 사생활의 비밀에 해당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증명 방법조차 모호한 사실혼 배우자의 요청만으로 의료기관이 진단서 등을 교부하도록 하는 것은 의료현장에 큰 혼란을 야기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한병원협회 역시 반대 입장을 표했다. 사실혼 관계에 대한 객관적 판단기준이 없어 의료현장 혼란을 가중시키고 불필요한 분쟁을 유발할 우려가 크다는 지적이다.
병협은 “혼인관계 여부에 대한 객관적 판단기준이 없는 만큼 병원이 자체적 판단으로 제증명서를 발급, 또는 거부하는 경우 모두 형사처벌이나 행정처분을 받게 될 것”이라고 토로했다.
현행 의료법만으로도 개정안 취지를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실제 의료법에는 공무원연금, 군인연금, 산재보험 등 각 연금 유족급여의 지급주체인 행정기관이 환자의 진료기록을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병협은 “만약 법 개정이 불가피하다면 국가 차원에서 사실상 혼인관계를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는 판단기준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