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下]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시범사업이 시작된 지 반년이 지났다.
정부는 병상 감축과 중증수술 증가, 회송 확대 등 다양한 수치를 통해 사업의 가시적 성과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의료현장 목소리는 다르다.
각종 수치는 우상향했지만, 그 수치를 떠받치는 진료체계와 인력구조, 그리고 교육 기능은 오히려 취약해졌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진료지원간호사(PA) 중심'으로 전환된 진료…의료비 부담은 누가
병원 내 인력구조 개편은 구조전환 현장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진료지원간호사(PA) 확대와 전문의 중심 전환으로 인해 진료비용과 수가 구조 간 괴리는 커지는 모습이다.
정재훈 고려대학교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지금까지 상급종합병원의 높은 효율성은 전공의와 임상강사 등을 통한 낮은 인건비 때문에 가능한 구조였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의정갈등 장기화에 따른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으로 이 같은 구조가 유지되기 어렵게 됐다.
그는 "앞으로 병원들이 전공의에 의존한 효율성을 기대하긴 어렵다. 상급종합병원도 전문의와 PA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며 “이에 따라 진료비가 10~15% 증가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실제 의정갈등 이후 상급종합병원들은 전공의 공백을 PA 확대 및 전문의 직접 진료, 당직 재편 등으로 대응해 왔다. 하지만 이는 인건비 부담을 가중시켰고 수가 보전 없는 채무 구조로 남아 있다.
이성규 대한병원협회 회장은 “의료개혁 정책은 병원 기능과 역할 변화를 요구하면서 재정 부담과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며 “이에 대해 보다 분명하고 구체적인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국민건강보험공단은 보험자로서 병원이 종별 기능에 충실하고, 지역간 균형잡힌 의료공급망을 유지·확충할 수 있도록 고민해달라"고 요청했다.
진료 현실과 괴리된 '중증도 분류'
질환 분류 기준이 실제 진료 난이도와 질병 특성을 반영하지 못하면서 중증 만성질환이 진료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증 천식이다.
정재원 일산백병원 알레르기내과 교수는 "중증 천식은 맞춤형 약제 사용과 다학제 협진이 필수적인 고난도 질환임에도 일반질환군으로 분류돼 구조전환 체계에서 치료 접근성이 제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생물학적제제를 써야 하는 환자조차 상급종합병원에서 진료받지 못하게 되는 건 제도적 모순"이라며 "중증도 분류체계를 전면 재검토하고, 구조전환 과정에 질환 특수성이 반드시 반영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학회는 중증 천식, 아나필락시스, 약물 알레르기 등 주요 고위험 알레르기 질환에 대해 별도의 ‘중증 전문질환군’ 지정을 촉구하고 있다.
실제 임상에서는 단순 질병 코드로 분류된 환자들이 적절한 의료 접근을 하지 못해 치료가 지연되거나 회피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 같은 문제는 만성질환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으며, 일부 진료과에서의 전공의 수련 왜곡 사안과도 연결된다.
중증도 분류 기준이 진료 질과 의료인력 양성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현 상황에서 단순한 빈도 기반 분류에서 벗어난 임상 중심의 재설계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제도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면 기능을 왜곡시킨다"며 "정책적 목표가 환자 안전과 연결되기 위해선 분류 체계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진료 축소로 교수 이탈 가속…"기준만 남고 사람은 없다"
이 같은 질환 분류 기준 문제는 진료 축소를 초래하고 급기야 교수 이탈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형외과에서는 이러한 분류체계 한계가 두드러진다. 정부는 중증질환군(A군) 중심의 기능 전환을 유도하기 위해 병상 조정, 진료군 분류, 성과지표 평가체계를 도입했지만 실제로는 고난도 수술임에도 A군으로 분류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진료가 위축되고 있다.
이재철 대한정형외과학회 홍보위원장은 "1·2차 병원에서도 많이 하는 치료는 B·C군으로 분류된다"며 "척추고정술의 경우 척수병증이 동반되지 않으면 몇 마디를 수술해도 C군"이라고 밝혔다.
이로 인해 정형외과 수술방은 적게는 20%, 많게는 50%까지 축소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교수들이 "미래가 없고 압박감을 느낀다"는 이유로 떠나고 있다.
특히 척추 분과를 중심으로 교수 사직이 이어지고 있다. 경상국립대병원, 울산대병원, 원광대병원, 충남대병원, 경북대병원에서 관련 교수가 사직했다.
충남대병원은 척추 담당 교수 2명이 모두 자리를 떠났다. 이밖에 인하대병원에서는 소아정형외과 교수가, 강원대병원에서는 골절 분야 교수가 각각 그만뒀다.
이재철 홍보위원장은 "이렇게 교수가 없는 상황이 되면 학회 차원에서 전공의 수련기관으로 인정을 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수련기관 자격조차 없어지게 된다"고 우려했다.
이어 "불합리한 중증도 분류 및 A군 비율 개선을 통해 정형외과 진료에 불이익이 없도록 해야 한다"며 "다빈도 및 중요한 질환도 진료하고 교육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금 필요한 건 지표 아닌 작동 구조"
정부는 중증도 기준 고도화, 수가 개선, 2차 병원 회송체계 강화를 지속 추진할 계획이다.
하지만 이미 의료현장에선 "기준과 분류가 현실을 외면한 상태에서, 지표만 확대되는 구조전환은 본질을 잃고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구조전환 본질은 병상 축소가 아닌 기능 회복이라는 주장이다. 그 기능은 단순히 어느 병원에 입원했는지가 아니라 '누가 진료했고, 교육과 인력은 유지됐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중증환자 중심 진료체계를 향한 개편이 진정한 전환점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이 수치를 멈추고 체계에 대해 다시 생각할 시점이라는 현장의 목소리가 비등한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