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GPT3.5가 일반에 공개된 이후 세계는 거대 언어모델 인공지능(AI) 기술의 혁명적인 발전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다.
특히 수출 중심 경제 구조를 가진 우리나라에 AI 산업은 국가 명운을 걸고 매진해야 할 핵심 분야임이 자명하다.
새 정부 역시 이런 시대적 흐름을 정확히 인식하고, AI 산업 육성을 위한 다각적인 제도 개선과 지원을 약속하고 있어 기대가 크다.
그러나 의료AI 기술은 환자 생명과 직결되는 만큼 다른 분야와는 달리 더욱 정교하고 신중한 접근이 필수적이다.
의료현장 현실과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추진되는 지원 정책은 오히려 생태계를 훼손할 우려가 크다.
의료AI 기술이 현장에 성공적으로 적용되기 위해서는 명확한 의료기기 인허가 가이드라인과 예측 가능한 보험수가 제도의 운영이 이뤄져야 한다.
'혁신'이라는 이름 아래 무차별적인 재정 지원이나 맥락과 맞지 않는 규제 완화가 진행된다면 기존 의료 시스템을 흔들고, 임상적 유효성이 검증되지 않은 기술들이 시장을 잠식할 위험이 크다.
이는 결국 기술 생태계 전체를 위협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져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우수한 기술을 보유한 기업마저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
신기술 의료기기는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를 받기 위해 의학적 정확성 입증이 필요하며, 이후 한국보건의료연구원 신의료기술평가 등을 통해 유효성이 입증돼야 건강보험 수가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임상 근거 창출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돼 AI와 같이 빠르게 발전하는 분야는 기업이나 산업을 육성해야 하는 정부 입장에서 어려움이 존재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비교적 쉽게 신기술을 임상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한시적으로 보험수가를 부여하는 '혁신의료기술'과 '신의료기술 유예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이 제도의 문제는 불확실한 임상적 유효성을 가진 의료기기의 임상시험 비용을 환자가 직접 부담하는 것이다.
이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면서도 논란이 많은 제도로, 환자의 권리를 침해할 뿐 아니라 의료 윤리에도 어긋나며 관련 산업 성장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환자 아닌 정부가 임상 비용 책임져야"
따라서 새 정부는 이런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고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첫째, 잠재력 있는 의료AI 기술에 대한 평가 기준을 명확히 수립해야 한다.
둘째, 평가를 통과한 유망 기술에 대해서는 환자에게 비용을 전가하는 대신 정부가 책임지고 임상시험 비용을 지원해 신속하고 정확하게 임상적 근거를 확보하도록 해야 한다.
셋째, 이렇게 축적된 근거를 바탕으로 신속히 신의료기술평가를 통과해 정상적인 건강보험 수가 적용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줘야 한다.
이것이 국내 의료 수준을 높이고 환자의 신기술 접근성을 제고하며, 건전하고 경쟁력있는 산업 생태계를 조성하는 올바른 길이라 생각한다.
현재 혁신의료기술이나 유예 제도가 병목 현상을 일으킨다고 해서 이를 단순히 폐지하거나 '선진입 후평가' 등의 우회로를 만드는 방식의 땜질식 처방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오히려 공보험 위주 의료 시스템 장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신기술 산업을 육성하고 이 시스템을 활성화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할 때다.
우리나라는 1980년대부터 전국민 대상 국민건강보험 제도를 구축했고, 주민등록번호 체계를 통해 국가 단위의 방대한 코호트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다.
세계적 수준의 의료 시스템 덕분에 축적된 디지털 의료 데이터 질(質) 또한 매우 뛰어나다.
이런 독보적인 강점을 AI 기술과 효과적으로 융합한다면 대한민국은 글로벌 의료AI 시장을 선도할 충분한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
아울러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은 임상적 기술 검증이 상대적으로 빠르게 이뤄질 수 있는 환경적 장점 또한 갖고 있다.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국내 특수한 강점과 현실을 철저히 고려해 적극적으로 좋은 의료AI 기술을 적용, 의료 수준을 한층 높이면서 의료AI 기업들의 국제적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
빠르고 효율적으로 옥석을 가려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선도 기업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체계를 만드는 게 새 정부가 추진해야 할 의료AI 정책의 핵심이 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