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문화 개선은 구실 불과, 갈등 본질은 '불신'"
교육부가 의대 족보 관여 밝히자 비판론···의료계 "문제 해법 잘못 짚었다"
2025.06.28 22:43 댓글쓰기



정부가 의과대학에 뿌리내린 '족보 문화'를 개선하겠다며 문제은행 플랫폼 도입에 나섰다.


교육부는 이를 통해 학습 자료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복귀 학생이 시험 준비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학생들 사이에서도 족보 의미와 실질적 영향력을 두고 입장이 엇갈리는 가운데, 의료계는 문제의 본질을 잘못 짚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교육부는 지난 6일 '의대 교육혁신 지원사업 기본계획'을 확정하고, 9일에는 전국 40개 의대에 관련 공문을 발송했다. 올해 총 540억 원의 예산은 정원이 늘어난 지역 의대 32곳에 등급별로 차등 배정되며, 서울 소재 8개 의대에는 30억 원이 일괄 지원된다.


이번 지원사업의 핵심 과제로는 '문제은행 플랫폼 구축'이 포함됐다. 기존에는 각 대학이 시험 문제를 자체 출제했지만, 앞으로는 공동 플랫폼에서 문제를 추출해 활용하는 방식이 도입된다. 


교육부는 이를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가 주도하는 문제은행 DB 구축과 공유 교육과정 플랫폼 사업에 각 대학이 적극 참여하도록 권고했다. 


이는 일부 의대생들이 족보에 과도하게 의존해 시험을 준비해온 학습 관행을 개선하려는 취지다. 아울러 교육부는 족보 접근 여부가 복귀생에게 실질적인 정보 장벽으로 작용해 복귀를 가로막는 원인 중 하나라고 판단하고 있다.


의대생들 사이에서 족보, 일명 '야마'는 단순한 요약본이나 기출문제 모음을 넘어 수업 적응과 시험 대비 핵심 수단으로 여겨진다. 


방대한 강의 자료와 수천 쪽에 달하는 교과서를 단기간에 소화하기 어려운 교육 환경 속에서 족보는 실제 강의 내용을 요약하고 핵심 개념을 정리해 놓은 일종의 '집단 지식 아카이브' 기능을 한 셈이다. 


한 의대 본과 3학년생은 "PPT 수천 장 분량을 혼자 정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며 "족보 없이는 시험을 못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일부 대학에서는 특정 학생들이 강의 필기와 기출문제를 분업해 정리하고 이를 취합하는 구조도 존재한다. 학년별로 족보 담당자가 정해지며, 이들은 강의 자료를 체계적으로 편집해 다음 학년이나 동기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고 전해진다.


교육부는 이처럼 족보가 학습 부담을 덜기 위한 보조 수단에 그치지 않고 학내 정보 접근을 좌우하는 비공식 체계로 작용해 왔다고 보고, 이를 무력화하기 위해 문제은행 도입을 추진한 것이다. 


실제로 일부 대학에서는 복귀생에게 족보 공유를 제한하거나 "시험을 보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경고성 메시지를 전달한 정황도 있었다.


의대 교수들 "대다수 의과대학 족보문화 탈피한 지 오래됐다" 


하지만 의료계와 현장 교수들은 정부의 이러한 해석이 교육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채 단편적인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며 강하게 반박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지난 12일 발표한 입장문에서 "의대생들이 돌아가지 않는 것을 소위 족보 문화 때문으로 규정하는 것은 의학교육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현재 대부분의 의대에서는 구시대적인 족보문화를 탈피한 지 오래됐으며 문제은행식 출제 및 문항출제를 위한 의대와 교수들의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대학 과정에서 족보문화는 대부분의 학과에서 학생들 학습 편의를 위해 이뤄지는 자발적 정리문화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면서 "굳이 의대에 국한해 족보문화가 있는 것으로 호도하면서 학생들의 주장을 왜곡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의대 교수들도 비슷한 입장이다.


수도권 소재 A 교수는 "족보는 옛날 이야기"라며 "지금은 실기시험도 어느 정도 공개돼 있고, 선배가 후배에게 배타적으로 제공하는 구조도 아니다. 대부분 자료는 누구나 구할 수 있고, 사실상 문제은행 같은 형태에 가깝다"고 전했다. 


또한 "의대 인쇄소 등에서 관련 자료를 쉽게 구할 수 있으며, 그것이 선배로부터 후배에게만 제한적으로 전달된다고 보긴 어렵다"고 덧붙였다. 


족보 접근 제한이 단체행동 배경이라는 정부 해석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부정적인 프레임을 씌우려는 시도일 뿐 별 의미는 없다고 본다. 족보를 구하지 못해 단체 행동에 참여한다는 건 사실이 아니"라고 일축했다.


또 다른 의대 B교수는 "족보 문화는 의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많은 학과에서 기출문제를 모으고 정리자료를 공유하는 관행이 존재한다. 다만 의대는 시험 부담이 워낙 크다 보니 이 관행이 보다 보다 구조적으로 갖춰졌을 뿐이며, 이를 병폐로 몰아붙이는 건 지나치다"고 말했다.


B 교수는 이어 "학생들이 복귀를 주저하는 이유는 정부에 대한 불신, 학사 불이익에 대한 우려, 학생 간 연대 의식 등 복합적인 요인이 맞물려 있다"며 "지금은 족보 통제가 아니라 학생과 학교 사이, 그리고 학생들 간 관계 회복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문제은행 도입에 대해선 "장기적으론 일정 의미가 있지만, 지금의 복귀 갈등을 풀 수 있는 실질적인 해법은 아니"라며 "예산을 투입해 플랫폼을 만들겠다는 계획보다, 오히려 학생들 개별 상황에 맞는 상담과 중재, 그리고 제도적 보호장치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이 같은 인식 차이가 좁혀지지 않은 채 정부의 해결 시도도 지지부진하다는 점이다. 보건복지부 장·차관 인선이 아직 이뤄지지 않으며 의료계와의 대화 창구는 사실상 닫혀 있다. 교육부 역시 복귀율 자료는 공개했지만, 갈등 해소를 위한 적극적인 중재나 대화 시도는 아직 눈에 띄지 않고 있다.


A 교수는 "현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즉 정부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선언적인 합의문이 도출되는 방법밖에는 없을 것 같다"면서도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2020년 9‧4 의정합의 수준도 이뤄지기 어려울 것 같은 분위기"라고 말했다.


B 교수는 "의대생들이 원하는 건 특혜가 아니라 최소한의 예측 가능성과 공정성"이라며 "새 정부가 이 사안을 방치하는 것은 단지 학사 문제가 아니라 향후 의료 시스템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중대한 방기"라고 경고했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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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 2000
  • dr 06.30 07:19
    복지부가 얼마나 무능하고 현장에 무지한 지를 보여주고 있다.
  • 의사 06.29 21:28
    그냥 의사, 의대생들에게 악마 프레임을 씌우기 위한 것이죠. 보복부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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