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현재 정부와 의료계가 대치하는 ‘의대 정원 증원’ 문제는 국가가 의사 인력 수급을 다루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지속된 해묵은 과제다.
정부는 의사 인력의 부족 혹은 과잉이라는 현상적 문제 해결에 급급한 나머지, ‘증원’과 ‘동결’이라는 단순한 선택지 외에 다른 해법을 찾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갈등을 이해하려면 현상 너머의 근원적 문제를 파고들어야 한다. 1990년대부터 코로나 팬데믹을 거친 오늘에 이르기까지, 문제의 진짜 핵심은 의사 인력의 절대적인 숫자가 아니다.
바로 보건당국이 적절한 근거 기준이나 의사결정 체계 없이 의대 정원 정책을 일방적으로 수립하고 결정해왔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합리적·민주적 의사결정 체계 부재’로 인해 이해관계자 간 합의와 조정, 체계적 절차와 객관적 근거가 실종된 것이다.
의사 인력 수급체계 위한 거버넌스 필요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논란의 발단은 지난 수십 년간 보건의료 인력계획에 대한 체계적인 의사결정 구조가 부재한 데서 기인한다. 따라서 의대 정원을 비롯한 의사 인력 수급 정책을 수립하는 데 있어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중대 과제다.
연구에 따르면(Lim & Lin, 2021), 의료 인력 거버넌스는 대부분 보건의료 거버넌스에서 파생된 개념으로 쓰이지만 정작 의료인력 문제 특수성을 반영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의료 인력 거버넌스에서는 ‘이해관계자 참여’와 ‘전략적 방향성’이 필수적이지만 기존 보건의료 거버넌스는 ‘관리적 측면’을 더 강조하고 정치적·이해관계자 요소는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보건의료체계는 다양한 요소가 유기적으로 얽혀 국민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 의사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면 이 모든 요소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제도, 재정, 고용 관행 등과 연계된 의사인력 사안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보건의료 거버넌스와 의사인력 거버넌스를 구분해야 한다. 의사인력 역량을 강화하고 유지하며, 의료 시스템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의사 인력 문제에 특화된 거버넌스가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껏 이러한 거버넌스가 없었던 이유는 의사인력 수급에 대한 장기적·전략적 계획 자체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한국 의사인력 계획은 문제가 터지면 임시방편으로 대응하는 ‘반응적 대체(reactive replacement)’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인력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고 의료 서비스 질을 높이려면 ‘전략적 의료인력 계획’이 선행돼야 하며, 바로 이 계획의 존재가 거버넌스에 대한 요구를 필연적으로 증가시킨다.
현재 국내 의사 인력 거버넌스 현황…5개 위원회 있지만 실상은 유명무실
국내에서 의사 인력 수급 정책을 논의하는 기구는 모두 ‘위원회’ 형태로 존재한다. 현재 총 5개 관련 위원회가 있으나, 이들의 존재가 곧 거버넌스 확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법적 근거를 갖추고도 장기간 운영되지 않거나 실질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해 유명무실하다는 비판 속에 폐지 또는 통폐합 대상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지금까지 정부는 위원회 설립을 거버넌스 구축과 동일시해왔다. 그러나 거버넌스는 ‘주체, 도구, 목표, 성과’가 명확한 프레임워크로서, 위원회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개념이다.
수십 년간 의사인력 사안이 해결되지 못한 채 갈등이 반복됨에도, 해당 위원회에서는 유의미한 논의나 심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설립 목적을 다하지 못했다.
또한 최근 정부가 추진하던 의료개혁특별위원회는 ‘의료인력수급추계위원회’로 명칭이 변경되고 기능이 축소됐다. 이는 인력 ‘계획’이라는 포괄적 기능 대신 ‘추계’라는 기술적 역할에 한정될 가능성을 시사하며, 진정한 의사 인력 거버넌스의 토대로서 기능하기 어려울 것임을 암시한다.
다른 나라 의사인력 거버넌스 현황
호주는 의료인력에 대한 전략적 계획을 수립하는 대표적인 국가다. 인력 교육·훈련부터 배출까지, 양성 과정 전 주기에 걸친 정책 파이프라인이 유기적으로 구축돼 있다.
2024년 신설된 MWAC가 핵심 자문기구 역할을, HWT가 정책 실행을 담당하며 단기, 중기, 장기 전략을 체계적으로 개발하고 감독한다.
네덜란드 역시 체계적인 계획하에 정교한 정책을 수립, 실행한다.
의료인력계획 자문위원회(ACMMP)가 수요와 공급을 예측해 정책을 제안하고, 네덜란드 보건의료연구소(Nivel)는 데이터 수집과 분석을 통해 과학적 근거를 제공한다. 두 기구는 긴밀한 협력 관계를 통해 데이터 기반의 거버넌스를 실현한다.
미국은 연방-주 정부 간 협력 구조가 특징이다. 연방 정부(HRSA 산하 BHW 등)가 정책 가이드라인과 재정을 지원하면, 주 정부가 지역 상황에 맞는 맞춤형 인력 정책을 실행한다.
국가 보건의료 인력 분석센터(NCHWA)는 데이터 기반의 수요·공급 예측을 지원하며 실시간 추계 정보를 제공한다.
일본은 후생노동성 산하 위원회를 중심으로 문제를 다룬다. 특징적인 것은 위원회 구성원의 절대다수가 의료 분야 전문가이며 정부 관료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는 의료계 전문성과 주도성이 정책 논의 과정에서 강하게 반영됨을 의미한다. 정부 개입을 최소화해 의료계 전문가들 검토가 정책 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조다. 다만, 공개된 자료가 제한적이어서 심층 분석에는 한계가 있다.
지속가능 정책 위한 '한국형 거버넌스' 필요 조건
수십 년간 이어진 의사인력 수급 정책 갈등을 끝내기 위해 거버넌스 구축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다. 의사인력 수급 현황을 정확히 분석하고, 보건의료체계 전반을 고려한 추계를 근거로 미래 인력 규모를 결정해야 한다.
이 과정이 합리적이고 이해관계자들이 수용 가능한 결과를 낳으려면, 잘 짜인 거버넌스 체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와 관련 기관이 협력해 명확한 정책 방향을 설정하고, 이해관계자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책임, 리더십, 이해관계자 참여, 근거 데이터, 전략적 방향 수립’과 같은 필수 요소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효과적이고 민주적인 정책 과정은 단순히 위원회 하나를 설치한다고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호주, 네덜란드, 미국 사례는 국가 주도, 협력적 거버넌스의 좋은 모델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런 제도를 그대로 이식하는 것은 또 하나의 유명무실한 기구를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국외 사례를 참고하되 한국의 특수한 상황에 맞는 독자적인 거버넌스 체계 기틀을 마련하고,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전문가들 지혜를 모아 끊임없이 적용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