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대한민국 외과에 '감동과 희망' 전하는 병원
진주제일병원, 반백년 55년 ‘수술’ 외길 매진···정부·의료계 관심 필요 '롤모델'
2021.03.08 05:31 댓글쓰기
대한외과학회-데일리메디 공동기획
‘대한민국 필수의료 책임지는 지방 외과병원을 가다…⓵진주제일병원
 
[데일리메디 박대진 기자] 필수과이지만 기피과이기도 한 대한민국 외과. 암울한 상황은 좀처럼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외과의 위기는 대한민국 의료의 위기라는 경고가 무색할 정도다. 세계적 수준의 술기에도 불구하고 열악한 처우에 지원자까지 줄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지역에서 수 십년 동안 묵묵하게 수술외길을 걷고 있는 병원들이 적잖다. 데일리메디는 대한외과학회와 함께 힘겨운 저수가, 인력난 상황에도 흔들림 없이 외과의 뚝심을 이어가고 있는 전국의 병원들을 발굴, 조명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이익만을 좇았다면 결코 불가능했을 그 숭고한 고행을 알림으로써 외과의 중요성을 각인시킴과 동시에 보다 많은 외과병원들이 술기본연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의료환경을 조성하는 울림의 시작이기를 고대한다. 대한외과학회 이우용 이사장이 직접 동행한 의미 있는 첫 행선지는 경남 진주에 소재한 진주제일병원이다.
 
수술과 함께 한 반백년, 국내 외과 표상
 
너무 감격스럽고 꿈을 이룬 것 같습니다.” 졸수(卒壽)를 앞둔 노() 의사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국내 외과의사들의 대표단체인 대한외과학회 이사장의 방문. 반세기 인생을 지방에서 묵묵하게 외과 외길을 걸어온 그에게는 감격그 이상으로 다가왔다.
 
정회교 대표원장은 제일외과의원을 시작으로 경남권 외과수술의 메카로 자리잡은 오늘의 진주제일병원을 일군 국내 외과계의 큰어른이다.
 
진주제일병원의 역사는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회교 대표원장이 군의관을 마치고 개원한 제일외과의원이 태동의 시작이었다.
 
건강보험제도가 도입될 즈음인 1981년 지금의 자리에 종합병원을 개원했다. 당시 응급수술이 가능한 경남의 유일무이한 종합병원이었다.
 
이듬해인 1982년 발생한 경남 의령 순경 총기 난동사건은 진주제일병원의 정체성 확립에 큰 계기로 작용했다.
 
경남 의령에서 현직 경찰이 하룻밤 사이에 주민 62명을 살해한 끔찍한 이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진주제일병원은 총상 환자를 전담으로 치료했다.
 
군의관 출신 원장에 응급수술이 가능한 진주제일병원으로 환자들이 이송됐고, 정회교 대표원장을 비롯한 의료진은 촌각을 다투는 여러 총상 환자들의 생명을 지켜냈다.
 
이후 수술 잘하는 병원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승승장구했다.
 
독보적 존재감에 안주할 수도 있었지만 정회교 대표원장은 환자에게 보다 나은 치료법을 제공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새로운 술기에 도전했다.
 
개복수술이 주를 이루던 당시 개념 조차 생소했던 복강경 수술에 주목했다. 배울 곳도 없었기에 진료 후에는 비디오 테이프로 술기를 익히고 돼지로 연습을 거듭했다.
 
드디어 19934월 경남 최초로 복강경 담낭 절제술에 성공하며 진주제일병원의 복강경 역사가 시작됐다. 현재 이 병원 외과계 수술의 98%가 복강경으로 이뤄진다.
 
정회교 대표원장의 아들이자 후배 외과의사인 정의철 병원장의 합류는 진주제일병원의 비약적 발전을 일군 변곡점이 됐다.
 
아버지가 외과 중심 병원의 기틀을 다졌다면 아들인 정의철 병원장은 열정과 과감한 추진력으로 진정한 외과병원으로의 도약을 이뤄냈다.
 
정의철 병원장은 1996년 병원에 합류해 2002년 복강경 대장암 수술, 2003년 복강경 위암수술을 잇따라 성공하며 복강경 수술 전문병원의 입지를 다졌다.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한 2005년부터는 수술과 경영을 병행하며 진주제일병원의 중흥을 이끌고 있는 중이다.
 
진주제일병원의 연간 외래환자 수는 388000. 진주시 인구가 34만명인 점을 감안하면 서부 경남 지역의 외과병원으로 확고히 자리매김 했다.
 
정의철 병원장이 부임할 당시 단 2명이던 외과 전문의는 현재 15명으로 늘었다. 전체 의사수는 55명이다. 270병상 규모임을 감안하면 타병원 대비 의료진 과잉에 가깝다.
 
15명의 외과 전문의 수는 전국 종합병원 중에서도 최상위권이다. 이렇게 탄탄한 의료진을 기반으로 진주제일병원은 연간 응급수술 245건을 비롯해 총 6615건의 수술을 시행 중이다.
 
특히 지난해에는 경상남도로부터 중증응급환자 야간휴일 수술병원으로 지정되며 지역 내 응급환자 생명권 사수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암수술 역시 위, 대장, 유방, 갑상선, 직장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연간 251건을 수행하며 굳이 서울의 대형병원을 가지 않아도 믿고 찾을 수 있는 병원임을 스스로 입증시켰다.
 
실제 진주제일병원은 대장암 적정성 평가에서 7년 연속 1등급을 받으며 서울 대형병원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위암, 유방암 평가에서도 호성적을 이어가고 있다.
 
어려운 여건 불구 선망의 병원 부상, 의료진 모두 낭만닥터
 
정의철 병원장은 진주제일병원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성장해올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로 주저없이 조직문화를 꼽았다.
 
사실 진주제일병원 의사의 삶은 결코 녹록치 않다. 24시간 응급진료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2012년부터 내과와 외과 임상과장은 물론 원장들도 당직을 서고 있다.
 
환자 입장에서는 낮에 외래에서 만난 과장이 새벽에 병실에서 자신을 진료해주니 만족감이 높을 수 밖에 없지만 의사들 입장에서는 여간 고단한 삶이 아니다.
 
야간당직 후 진료를 보는 게 일상이고, 새벽에도 전화를 받고 집을 나서야 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하지만 진주제일병원 의사들은 그 고단함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쯤되면 최면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체 540명의 직원 중 30년 이상 근속자 27, 20년 이상 근속자 51, 10년 이상 근속자 81명이라는 숫자가 이를 방증한다.
 
특히 외과의사들의 경우 그 고단한 삶을 알면서도 이 병원에 들어오기 위해 기나긴 대기도 기꺼이 감수한다.
 
정의철 병원장은 "사실 지역 중소병원에 지원하는 사례가 많지 않아 진주제일병원 역시 외과의사 확보가 어렵지만 다행이 뜻을 같이 하고자 하는 분들이 있어 그나마 15명의 외과 전문의와 함께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현상은 내과, 외과 중심의 급성기 질환 진료를 통한 지역 필수의료 수행이라는 진주제일병원의 지향점이 의사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특히 대학병원을 제외한 일반병원에서 자신이 배운 술기나 고난도 수술을 수행할 기회가 없어 힘들어 하는 외과의사들에게는 진주제일병원이 제격이라는 평가다.
 
박중재 진료부원장은 편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 외과의사가 된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라며 칼잡이의 진정한 자존감을 지켜주는 병원 문화에 의사들이 공감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의료진 스스로 인기 드라마 낭만닥터주인공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하지만 술기를 통해 의사의 존재감과 보람을 찾는 우리 모두 김사부라는 확신으로 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진주제일병원의 독특한 공유의 미학과 교육철학 역시 외과의사들의 호감도를 키웠다는 분석이다.
 
복강경 수술에 관한 실력과 전통이 전국 최고인 진주제일병원은 그동안 쌓은 경험과 노하우를 2차 병원들에게 아낌없이 공유하고 있다.
 
정의철 병원장은 ‘2차 병원 외과 복강경 수술연구회창립 멤버로 참여해 외과의사들과의 정보교류에 앞장섰다. 연구회 2대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대학병원 중심의 외과 교육만으로는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더라도 할 수 있는 수술이 거의 없거나 전임의 과정을 마쳐도 실제 진료현장과 차이가 많아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에 2차 병원 외과의사들이 모여 지식과 정보를 연구하고 공유함으로써 술기를 표준화하고 서로의 실력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 연구회를 통해 병원에 합류하게 된 김원연 교육부장은 외과의사로서 자존감을 찾기 어려웠던 시기에 진주제일병원을 알게 됐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합류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어 필수의료를 수행하려는 진주제일병원의 지향점은 외과를 선택했던 초심을 일깨웠다몸은 조금 고되지만 비로소 써전(surgeon)임을 느끼며 살고 있다고 덧붙였다.
 
진주제일병원은 비록 전공의가 없지만 자체 심화교육을 통해 술기를 가르치고, 외부 병원으로의 교육 지원도 아낌없이 지원한다.
 
정의철 병원장은 생명을 다루는 외과의사에게 술기의 숙련도는 매우 중요하다심화교육을 거친 후에야 단독수술을 할 수 있도록 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말했다.
 
"지속 가능할까" 현실 벽(壁)으로 인한 서글픈 고민
 
진주제일병원이 꽃길만 걸어온 것은 결코 아니다. 전국민 의료보험이 도입된 1989년까지만 하더라도 경영에 큰 신경을 쓰지 않고도 수술에만 전념할 수 있는 진료환경이었다.
 
하지만 건강보험 수가가 도입되면서 외과에 험로가 펼쳐지기 시작했고, ‘외과병원을 지향하던 진주제일병원 역시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외과의 위기는 일선 인프라 부족으로 이어졌고, 진주제일병원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경남 지역 필수의료를 무거운 짐을 떠안게 됐다.
 
주변에 야간이나 휴일에도 24시간 응급수술이 가능한 병원이 없다보니 진주제일병원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뿐만 아니라 고령자와 취약계층이 많은 중소도시 특성상 서울 대형병원으로 가지 못하는 환자들에게도 수술 기회를 제공해야 했다.
 
그러나 수술을 할수록, 응급실을 운영할수록 적자가 나는 구조는 진주제일병원의 정체성에도 큰 위협 요소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정의철 병원장은 외과병원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의료진을 늘리고 신관 건립, 리모델링, 편의시설 보강 등 과감한 투자를 이어갔다.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환자들에게 보다 나은 진료를 제공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정의철 병원장은 우리가 필수의료를 제공하지 않으면 진료 기회조차 받지 못할 환자들이 많기 때문에 그들을 보듬을 능력을 키워야 하고 성장해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그의 뚝심도 최근 흔들리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이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의 빈도가 부쩍 늘었다.
 
사실 여느 병원과 비교하면 진주제일병원 운영 시스템은 비정상적이다. 뻔한 적자구조를 의료진의 희생으로 메꾸는 구조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하석상대(下石上臺)인 셈이다.
 
정 병원장은 의료진 희생으로 운영되는 작금의 구조가 과연 정상적인지 위정자들에게 묻고 싶다지속성에 대한 고민이 커질 수 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포상은 바라지도 않는다. 지역에서 공공병원 역할을 대신해 필수의료를 수행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보상이라도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대한외과학회 이우용 이사장 역시 정부가 진주제일병원 같이 지역에서 필수의료를 담당하는 병원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외과병원들의 상황에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경영지표에 적색 신호등이 켜지면서 지속 가능성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진주제일병원은 화상센터를 개소했다.
 
화상은 힘겨운 외과 중에서도 가장 손실이 큰 분야라는 사실은 병원계에 공공연한 비밀이다. 정의철 병원장 역시 그 사실을 모를리 없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치료받을 곳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환자들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였다. 여느 경영자라면 결코 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여기에 더해 정의철 병원장은 신임 외과과장을 국내 화상치료의 성지인 한강성심병원으로 교육을 보내 치료법을 배우도록 했다.
 
경영적으로는 당연히 적자이겠지만 그 수치에 연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병원이라면 환자에게 필요한 의료를 제공해야 하니까요.”
 
정의철 병원장은 앞으로도 현재의 운영철학을 고수할 것이냐는 질문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다고 답했다.
 
다만 병원 운영은 의지와 열정만으로는 불가한 만큼 환자를 위해 올바른 길을 가려는 병원들이 그 뜻을 이어갈 수 있도록 정책과 제도의 변화가 수반돼야 한다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댓글 0
답변 글쓰기
0 / 2000
메디라이프 + More
e-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