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릉이 타는 왕진의사 '환자와의 신뢰가 자산'
추혜인 의료복지협동조합 살림의원 원장
2020.09.29 05:39 댓글쓰기
[데일리메디 한해진 기자] 가정의학과 추혜인 전문의는 다양한 수식어로 묘사된다. 그는 서울시 은평구 소재 의료복지 사회협동조합 ‘살림의원’ 원장이다. ‘동네 주치의’로서 건강한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 온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병원에 가기 어려운 장애인과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을 위해 ‘따릉이’를 타고 거리를 누비는 ‘왕진의사’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진료 과정에서 소외되기 쉬운 여성 환자들과 그간의 왕진 경험 등을 엮은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이라는 책을 펴냈다. 여성주의만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기는 힘들지만, 여성주의 없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없다는 신념으로 누구나 차별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추혜인 원장을 최근 데일리메디가 만났다. [편집자주]

Q. 코로나19 상황으로 많이 바빴을 것 같다
감염 사태가 심각했던 2~4월에 은평구 보건소에서 선별진료소 자원활동을 했다. 동네의원 의사 선생님들이 많이들 나섰다. 초기에는 오전 7시부터 10시까지, 주 7일 내내 선별진료소를 운영하다 보니, 보건소 인력만으로는 부족해 지역의사회를 통해 자원활동 요청이 왔었다. 지금은 보건소 인력으로 운용할 수 있는 정도라 따로 자원활동 요청은 없다. 살림의원을 찾는 환자들은 많이 줄었다. 가정의학과, 정신건강의학과, 산부인과를 운영 중인데 특히 가정의학과를 많이 찾던 소아 환자의 수는 코로나19 전과 비교해 10분의 1도 안된다.
 
Q. 의료협동조합 설립에 참여해 지금까지 활동 중이. 조합 활동이 왕진에 관심을 갖는 데 영향을 줬는지
2012년부터 의료협동조합을 준비할 때부터 조금씩 왕진을 다녔다. 협동조합 준비 당시, 조합원 한 분이 조심스럽게 왕진을 요청했다. 어머니가 요양원에 계시고 몇 주째 기침을 하는데, 요양원 측에서는 근처 의원에 가서 약만 처방받아 와서 드시게 하고 정작 어머니는 진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직접 요양원을 찾아가 청진기로 폐음을 들어보니 폐렴이 의심돼 병원 진료를 권했고, 중환자실에 1달 정도 입원해 치료받다가 돌아가셨다.
개원 후에도 꼭 필요한 경우 왕진을 간혹 나갔지만, 2018년 이전에는 내원 진찰료와 왕진 진찰료가 동일했고, 일과시간 후 혹은 주말에 다녀야 해서, 사실 자주 하지는 못했다. (1989년에 왕진이 이미 합법화됐다.) 최근 2018년부터 장애인주치의 시범사업이 시작됐고, 2019년에는 왕진시범사업까지 실시돼 왕진수가도 신설되고 나니, 왕진 신청도 늘어났고 왕진 나가는 횟수도 더 많아지게 됐다. 조합에서 이런 지역사회 의료보장을 위한 시범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이라, 자연히 왕진을 세팅하는 데 좋은 영향을 줬다.
Q. 왕진 시범사업이 환자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도움이 되고 있는지 궁금
여러 사정으로 병원에 가지 못하는 환자들이 많이 신청한다. 특히 누워서 지내야 하는 와상(臥牀) 환자가 많다. 큰맘 먹고 병원에 가려 해도 119를 불러야만 하고, 돌아올 때는 20~25만원의 비용을 들여 사설구급차를 이용해야만 집으로 올 수 있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막상 큰 병원에 가서도 제대로 된 진료를 받기 어렵다. 왜냐하면 내내 와상으로 집에서 누워계신 터라, 큰 병원 의료진들이 환자 상태를 잘 알고 있지 못하다. 이러니 모든 검사를 늘 처음부터 해야 해서 부담이었다.
15년 넘게 누워서 생활한 와상환자도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 4층에 사시는 터라, 1년 넘게 아무런 병원도 가지고 못하고 혈액검사도 없이 약만 처방받아 드시고 계시는 상태였다.(보호자 대리처방) 살림의원에서 장애인주치의 왕진을 나가게 되면서 혈액검사를 정기적으로 받기 시작했고, 올해 당뇨를 진단받기도 했다. 지금은 가정간호서비스를 제공하는 큰 병원으로도 잘 연결됐다. 사실 가정간호서비스를 신청할 때도 움직이지 못해 외래 진료를 못 받으니 연결이 쉽지 않았는데, 환자 상태를 자세히 설명한 장문의 가정간호의뢰서를 썼더니 해당 병원에서도 환자 사정을 배려해 가정간호를 약속해줬다. 의료기관 간 신뢰를 느꼈던 사례이다.

"왕진 시범사업 실시 후 수가 신설되고 실제 현장에서 왕진 요청하는 사례도 늘어"
"오랜기간 집에서 누워 있는 와상 환자들, 의료기관 간 신뢰 있으면 더 좋은 서비스 가능"
"의료사고는 의사 실력과 무관하게, 의료소송은 의사 인성과 관계없이 일어날 수 있다"
 
Q. 말씀한 사례는 의료계나 정부가 항상 강조되는 ‘의료전달체계 정립’의 좋은 예가 아닌지
그 환자분이 집에서 지내다가 바이탈이 안 좋아져 119를 타고 응급실에 갔을 때,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우리 병원에 왜 왔느냐’는 말이었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 환자들은 무척 서운할 수밖에 없다. 내가 믿고 갈 수 있는 병원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병원 입장에서도 정말 그 환자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하는 말일 때가 많다. 병원 방문 이력이 10여 년 전 뇌출혈로 입원했던 때 기록 뿐이니, 좀 더 자주 가는 병원이 있다면 차라리 그 병원을 가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하는 거다. 환자 상태를 정확히 알아야 적절한 진료를 할 수 있는데, 집에서 와상으로 오래 계시던 분이 오면 병원 입장에서도 난감하다. 이럴 때 왕진을 하면서 환자를 오랫동안 관찰해왔던 동네 주치의의 꼼꼼한 소견서는 큰 힘이 된다. 환자 상태를 잘 알 수만 있다면 치료를 거부하는 병원은 절대 없으니까.
 
Q. 최근 일차의료 중요성도 많이 강조되고 있는데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당장 실천 가능한 현실적인 대안이라면 진찰료 차등제가 어떨까 한다. 프랑스에서 도입하고 있는 것인데, 길고 복잡한 상담을 요하는 진료와 간단하거나 짧은 진료의 진찰료를 차등으로 매기는 것이다. 현재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상담료를 시간에 따라 다르게 매기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낮은 수가로 인한 박리다매식 의료서비스가 악순환을 가져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1차 의료기관에서 환자와 대화할 시간이 충분하다면, 불필요한 검사도 오진도 많이 줄어들 것이다. 현재와 같은 수가체계 안에서는 환자에게 암을 고지할 때도, 감기를 진료할 때도 같은 진찰료를 받게 되니, 긴 상담이 필요한 환자, 통합적인 설명이 필요한 환자, 자세한 교육이 필요한 환자들의 진료가 꺼려지게 될 수 있다. 근본적으로는 주치의제도가 도입됐으면 좋겠다.
Q. 의사와 환자 간 신뢰도 매우 중요한 것 같은데
신뢰가 자본이라고 생각한다. 신뢰가 곧 브랜드 가치이며 자본이라는 얘기는 경영학에서도 많이 하고 있다. 돈이 된다는 의미에서의 자본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자본’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신뢰가 탄탄할수록 불필요한 지출이 줄어든다. 의료사고 소송이 빈번한 미국에서는 어떻게 하면 소송을 줄일 수 있을지를 항상 연구하는데, 항상 결론은 신뢰다.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의사소통이 핵심이다. 신뢰가 없다면 의사와 환자 모두 힘들다.
좋은 의사 선생님들이 소송에 휩쓸리는 경우가 있다. 환자들에게 잘 해주시니까 인기가 많고, 그러니까 너무 바빠지고, 결국 일에 쫓기다 사고가 일어나는 것이다. 의료사고는 의사 실력과 무관하게 발생할 수 있고, 의료소송도 의사 인성과 관계없이 일어날 수 있다. 치료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의사와 환자/보호자 간 소통이 충분했고 그 과정에서 신뢰가 있었다면 소송까지 가지 않는다. 사회적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치료과정이 보장돼야 한다.
 
Q. 협동조합에서는 어떤지
환자들은 의사가 검사나 치료를 권유할 때 ‘돈 벌려고 저러나’하고 의심하는 경우가 있다. 치료에 대한 불신은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좋지 않다. 저는 협동조합 설립에 참여하긴 했지만 월급을 받고 있고, 인센티브가 없다. 즉, 살림의원 매출이 저의 수입과 관계 없다는 걸 환자들이 잘 알고 있다. 의외로 그런 측면이 신뢰의 조건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Q. 의사 모집도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근무 환경시 장점을 든다면
전국의 모든 의료협동조합이 항상 같이 일할 의사 선생님들을 찾고 있다. 가장 큰 장점은 주40시간 이하 진료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 또한 왕진 시간을 합해도 35시간 정도 근무한다. 많은 집중력을 요하는 진료의 질(質) 유지를 위해서다. 우리 조합은 산부인과와 정신과, 가정의학과가 함께 근무하고 있어 협진이 용이하다. 치과도 같이 있다. 또 급여가 생각보다 낮지 않다는 측면도 강조하고 싶다.
더불어 왕진을 갈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왕진을 하다 보면 의사 진료가 그 환자의 건강에 관여하는 정도가 사실 크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욕창 관리를 예로 들면, 욕창 처치는 의사(간호사)가 하지만 보호자나 요양보호사들이 환자의 자세를 바꾸고 기저귀를 갈아주지 않으면 순식간에 상태가 나빠지기 마련이다. 의료라는 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협력해야만 유기적으로 작동하는지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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