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의 단 하루를 생각하는 의사 24시간
권한성 교수(건국대병원 산부인과)
2019.04.20 06:39 댓글쓰기
날이 갈수록 의학 관련 드라마가 늘고 있다. 삶과 죽음, 그 안에서 교류하는 의사와 환자, 환자와 환자 간의 감정 등 병원에는 드라마적인 요소들이 넘쳐나기때문일 것이다.

산부인과는 한 인간의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모두 다루고 있는 만큼 의학의 여러 분야 중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이 글을 쓰면서 과다 출혈로 동공이 열릴 정도의 저혈량성 쇼크에 빠졌다가 대량 수혈과 수술로 목숨을 건진 산모, 4번의 자궁외 임신 끝에 정상 임신에 성공한 산모, 자궁선근증이 심해 자궁을 떼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극적으로임신에 성공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분만한 산모, 임신 21주에 양막이 자궁경부 밖으로 나와 수술한 후 개월 수를 모두 채워 분만에 성공했던 산모 등 여러환자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고민 끝에 이 산모에 대해 쓰기로 결정했다. 산모는 다른 병원에서 재생불량성 빈혈을 진단받았던 분이다. 임신 23주에 전신에 심한 부종이 있어 외래로 왔다.

다니던 병원에서 진행한 검사를 보니 혈소판 수치가 정상치보다 떨어져 있었고 단백뇨가 있었다. 혈압은 135/95mmHg로 약간 높았고 혈소판은 2만 전후로 많이 감소했다. 산모에게 혈압이 높고 단백뇨도 있어 임신중독증일 가능성이 높고 혈소판이 많이 줄었으니 입원해서 검사도 해보고 수혈도 해야할 것 같다고 얘기했다. 

산모는 “바로 입원해야 할 정도인가요?”라고 물었다. 보통 임신중독증이 의심되는 산모는 초기에는 증상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 입원해야 한다고 말하면 놀라면서도 입원을 망설이는 경우가 많다.

임신중독증은 의학적으로는 전자간증이라고 하는데 임신 후 태반에서 유래한 물질이 전신 혈관을 망가트려 경련, 망막 손상, 간 손상, 신부전 등을 일으킨다. 치료하지 않고 방치할 경우 산모와 태아가 모두 사망할 수도 있는 무서운 질환이다. 손상된 혈관을 복구하는데 혈소판이 필요해 임신중독증이 진행될수록 혈소판이 감소하게 된다.

이 산모의 경우 임신중독증 때문에 혈소판이 감소한다기 보다는 재생불량성 빈혈과 임신 중 늘어나는 혈액량으로 인한 희석 효과 때문일 것으로 봤다. 어찌 됐던 임신중독증의 유일한 치료는 분만인데 이 산모는 23주고 태아는 예상 체중이 530g 정도라 지금 분만시키면 아이가 살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문제였다.

산모는 입원하고 하루 이틀이 지나서 이런 저런 설명을 듣고 나서야 상황을 깨닫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교수님, 아기가 살 수 있을까요? 더 나빠지지 말아야 할 텐데 걱정이에요” 라고 물었고, 나는 “지금 주수에서는 엄마가 우선이에요. 물론 아기가 가능한 하루라도 더 있다가 나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볼게요. 일단 혈소판을 수혈하면서 보자고요”라고 말했다.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9일이 지나 25주가 됐고 그 사이 혈압은 145/100~150/105mmHg까지 올랐다. 부종은 더 심해졌고 폐 주변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경련 방지 목적으로 쓴 약 때문에 기운도 많이 떨어져 있었다. 혈소판은 수혈을 해도 수일 안에 다시 원래 수치로 떨어졌다.

나는 이제 분만할 때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고, 산모는 “오늘 보니까 혈압도 조금씩 오르는 것 같고, 기운도 없어요. 저는 지금부터 교수님이 분만하라고 하시면 할게요”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조금만 더, 하루라도 더 끌자는 마음으로 분만 시기를 저울질하기 시작했고, 산모와도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25주 2일째부터 태아 폐성숙 유도 목적으로 스테로이드를 투여했다. 25주 5일째 혈압이 160/110mmHg까지 올라 혈소판을 수혈하면서 제왕절개술로 분만을 했다. 아기는 여자 아이였고 체중은 750g이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올해 6월 어느 날, 한 산모가 돌배기 아이를 안고 외래 진료실로 들어왔다. 나는 한 눈에 그 엄마를 알아보았고, 아이가 1년 전 750g으로 나왔던 그 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엄마는 밝은 표정으로 “선생님, 얼마 전 아기가 돌이었고, 한 번 보여드려야겠다 싶어서 데리고 왔어요” 라고 말했다. 아이는 750g으로 나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잘 컸고 예뻐서 담당 의사로서 보람을 느꼈다. 더불어 이렇게 잘 키워준  소아청소년과 의료진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가 너무 예쁘게 잘 컸어요.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지금 분만실에 있는 다른 엄마들이 힘낼 수 있게 한 번 보여주고 싶네요”라고 물었고 아기 엄마는 “그럼요”라고 답했다.  

난 지금도 가끔 그 아이의 사진을 보면서 산과의사로서 태아의 단 하루, 단 일주일의 의미를 되새기곤 한다. 분만해서 신생아중환자실로 가기까지 위험을 잘 관리하면서 단 하루라도 태아가 엄마의 자궁 안에서 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산과의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기 때문이다.

조산 가능성이 높은 산모, 그 중에서도 24주 전후 생존 한계 주수에 분만할 가능성이 높은 산모는 특히나 의사와 산모 사이의 래포(Rapport/감정적으로 친근감을 느끼는 인간관계)가 중요하다. 이 산모의 경우 좋은 래포가 형성돼 나를 믿고 따라준 덕분에 좋은 결과에 이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분만실과 신생아중환자실의 교수, 전공의 그리고 간호사들의 많은 수고가 있었음은 당연하다. 
 
이번 글을 쓰면서 나는 우리 병원에서 산과의사로 지내온 13년 동안의 많은 일을 반추해 봤다. 이런 저런 감정들이 교차하면서도 어려움에 처한 산모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도록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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