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디 박대진 기자
] 여느 병원이든 로비나 복도를 걷다보면 어렵지 않게 미술 작품을 마주한다
. 환자들의 심신치유부터 병원장 취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유와 사연으로 작품들이 걸려 있다
. 하지만 그 작품에 담겨 있는 의미를 읽어내는 내원객은 많지 않다
. 심지어 병원 직원들 조차 흔한 인테리어 소품 정도로 치부하기 일쑤다
. 박물관이 아닌 병원이기에 미술 문외한들이 연출하는 풍경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 그런 병원에서 독특한 책 한권이 출간돼 관심을 모은다
. 저자는 서울대학교병원 홍보팀에 근무하는 피지영 사원
. 미술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아온 그가 출간한 인생의 마수걸이 책 제목은
‘유럽미술여행
’이다
. 직장인으로는 언감생심 시도하기 어려운
‘3개월 휴가
’라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리고 떠난 미술사 기행기다
.
“인고의 3년, 독자에서 작가로”
무려 25년을 홍보맨으로 살아 온 그는 어느 날 원내 사이버 강의를 통해 ‘서양미술’에 눈을 떴다. 예기치 못한 용솟음에 당혹스러웠지만 그날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미술에 관심이 생긴 시점에 더 많은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한계로 ‘독서’를 택했다.
3년 간 관련 서적 1000권 읽기로 서양미술 전문가가 되기 위해 그리스 신화, 성경, 유렵 역사, 문학, 철학 등을 섭렵해 나가기 시작했다.
독서를 통해 미술과 호흡하면서 자신만의 또 다른 계획을 세웠다. 책 1000권을 독파하면 스스로에게 직접 ‘로마대상’과 ‘그랜드투어’를 선물하겠다는 다짐이었다.
‘로마대상’은 과거 프랑스에서 예술 분야에 두각을 나타낸 작가에게 로마로 유학을 보내주는 일종의 장학 프로그램이었다.
‘그랜드투어’는 영국의 귀족들이 성인이 되기 직전인 자녀에게 1~2년 동안 개인교사를 붙여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를 둘러보게 하는 통큰 성인식을 일컫는다.
무려 3년에 걸쳐 1000권 읽기를 끝낸 그는 자신에게 한 약속대로 ‘3개월’이라는 무급휴직 기간 동안 유럽여행을 떠났고, 책을 읽는 ‘독자’에서 책을 쓰는 ‘작가’로 성장했다.
그는 “행복을 위한 노력과 희생들이 무가치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행을 떠났다”며 “가장 큰 설레임은 책으로만 보던 수 많은 미술 작품을 직접 마주하는 일이었다”고 술회했다.
서양미술 투어의 필독서
‘유럽미술여행’은 그가 3개월 간 유럽 12개국, 박물관‧미술관 62곳을 다니며 그려낸 서양미술 이야기다. 마치 저자를 가이드 삼아 유럽 현지에서 듣는 ‘서양미술 투어’라고 할 수 있다.
중세 종교화부터 르네상스의 천재들, 바로크 화가들은 물론 인상주의와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회화, 조각, 건축을 초보자에게 들려주듯 쉽게 해설해 준다.
루브르 박물관의 작품을 하나하나 설명하자면 책 한 권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넘칠 정도의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작품을 세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누구나 공감하고 흥미로울 수 있는 이야기를 서양미술사와 함께 풀어냈다.
프라하에서 압생트를 마시며 고흐의 생애를 얘기하고, 미켈란젤로 언덕에 앉아 르네상스 4대 천재를 조명한다. 슬로베니아의 아름다운 섬 블레드에서 뒤러의 판화를 끄집어 내 서양미술을 들려준다.
피지영 작가는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자 목적은 지식과 정보를 얻는 게 아니라 서양미술, 유럽 미술여행에 대한 호기심과 재미를 갖게끔 부추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루브르 박물관 작품을 하나하나 설명하자면 책 한권으로는 어림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며 “스마트폰 하나면 넘칠 정도의 정보를 얻는 만큼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했다”고 덧붙였다.
준비된 ‘미술 전도사’ 자청
그는 지난 3년 동안 똑 부러지게 공부했다. 미술 관련 서적 1000권 돌파는 물론 한국사립미술관협회 도슨트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는 직장인 서울대병원에서 직원들과 내원객을 대상으로 ‘점심시간 서양미술 강의’를 진행하고, 주말에는 도서관에서 강의를 이어가는 중이다.
병원 홍보맨의 미술강의. 다소 생소할지 모르지만 그의 강의를 한 번 들은 사람들은 주저없이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운다.
피지영 작가는 “얼마 전 할머니 한 분이 ‘좋은 강의로 병원에서 힐링하고 간다’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사무직이라 직접 환자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힐링과 편안함을 줬다는 얘기에 내가 오히려 감동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미술의 매력을 느끼길 갈망한다. 계속되는 공부 역시 ‘미술 전도사’ 임무를 수행하기 위함이라고 스스로에게 각인시킨다.
피지영 작가는 “내가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좋아하는 사람들을 데려오고 싶은 것처럼 내가 사랑에 빠진 미술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 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그림 하나에도 충분히 감동적이고 기쁠 수 있다”며 “미술을 모른다면 인생에서 감동적일 수 있는 큰 부분 하나를 놓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