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 이번 제 논문에 공동저자로 이름을 올리고 싶습니다.”
“허허허, 나야 고맙지. 그래 연구는 잘 되고?”
“네. 배려해 주신 덕에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 고생하시게. 다음 번 내 논문에도 자네 이름 올려도 되겠지?”
사제(師弟) 간의 덕담어린 이 같은 대화는 옛말이 된지 오래다. 최근 의학자들 사이에는 공동저자 찾기가 ‘별따기’라는 푸념이 늘고 있다.
친분, 예우, 부탁 등에 의해 스스럼 없이 올렸던 공동저자가 품귀현상을 빚고 있다. 타 대학은 물론 같은 학교 내에서도 공동저자 찾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다.
논문에 게재되는 저자는 크게 주저자, 교신저자, 공동저자 등 세 부류로 나뉜다. 우선 해당 연구를 가장 주도적으로 수행한 사람은 제1저자 즉 ‘주저자’가 된다. 또 그 연구의 총책임자로 논문 제출 및 응답을 책임지는 사람이 교신저자다.
보통 교신저자는 저자 명단에서 맨 뒤에 놓이고, 그 이름 옆에 별표 등으로 교신저자임을 표시한다. 교신저자는 한 명이 아니고 두 명이나 세 명인 경우도 있다.
그 외에 사람들을 모두 통틀어 ‘공동저자’라 부른다. 저자 수에 대한 원칙이 없는 만큼 주저자와 교신저자를 제외한 공동저자는 친분에 의해 게재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실제 연구 구상에서 실험 진행, 논문 작성까지 모든 과정에서 전혀 개입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공저자에 포함되는 시절이 있었고, 이는 얼마 전까지 관행처럼 이어져 왔다.
명백히 따지면 이러한 공저자 표시는 연구 부정행위지만 학계에서는 그 동안 미덕으로 포장해 왔다. 부당한 저자가 포함됐다고 논문 내용이 바뀌거나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짜저자’, ‘선물저자’, ‘유령저자’, ‘명예저자’ ‘교환저자’, ‘도용저자’ 등의 단어들이 등장한 이유도 저자 게재에 대한 학계 안일함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최근들어 저자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 개인적인 친분 등으로 저자에 포함시켜 준다거나 서로 교환하듯 저자로 게재해 주는 풍토가 사라지는 중이다.
일부에서는 공동저자 기근현상을 토로할 정도다. 일선 연구자들이 무임승차는 물론 연구에 직접 도움을 준 저자들까지도 논문에 이름 올리기를 꺼리기 때문이다.
한 대학병원 기초의학 교수는 “요즘 공저자 구하기가 너무 힘들다”며 “연구 도움 요청은 고사하고 이름만 빌려달라는 부탁도 거절당하기 일쑤”라고 토로했다.
또 다른 대학 임상교수는 “최근 타 대학 교수로부터 공동저자 게재 동의를 구하는 전화를 받고 정중히 사절했다”며 “연구에 참여하지도 않았는데 이름을 올리는게 부담스러웠다”고 말했다.
‘무책임-무가치’가 빚은 촌극
연구자들은 이러한 기류의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분석하고 있다.
우선 논문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잇따라 불거지면서 연구윤리에 대한 책임이 강화됐고, 일선 연구자들의 공동저자 참여 기피현상으로 이어졌다는 해석이다.
결정적인 계기는 단연 황우석 사태였다. 당시 파장을 일으켰던 황우석 박사의 논문에는 총 25명의 공동저자가 있었다.
기념비적인 논문의 무게와 걸출함 때문에 군대 소대병력과 맞먹는 25명의 공동저자들은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지만, 진실이 밝혀진 이후 이들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됐다.
특히 당시 박기영 청와대 정보과학기술보좌관도 황우석 박사의 논문에 공동저자로 참여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학계의 ‘이름 올리기’ 관행이 여론의 뭇매를 맞은 바 있다.
이 사건 이후에도 제자 논문에 공동저자 형태로 무임승차한 정부 관료 및 사회 저명인사들의 행적이 잇따라 공개되면서 논문저자의 법적 책임이 한층 강화됐다.
공동저자들이 논문의 업적에 대해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다면 해당 논문이 잘못됐을 때에도 당연히 공동책임을 져야 한다는 정서가 커진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연구자들은 섣부른 ‘이름 올리기’로 인해 향후 법적이든 윤리적이든 책임을 져야할 상황에 놓일 가능성을 늘 염두해야 한다는 얘기다.
모 대학병원 연구조교수는 “최근 연구윤리나 책임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면서 공동저자 참여를 꺼리는게 사실”이라며 “직접 참여하지 않는 연구의 경우 대부분 사절한다”고 말했다.
공동저자 기근현상의 또 다른 이유는 ‘가치’의 문제다. 이는 대부분의 의학자들이 심각성을 고민하는 사안이기도 하다.
의학자들은 일단 예년 대비 공동저자에 대한 가치를 인정받기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입을 모은다. 공동저자로 참여해 봐야 얻어지는게 없다는 지적이다.
논문 가치 평가기준에 주저자와 교신저자만 인정하는 풍토가 짙게 자리잡으면서 연구자들에게 공동저자 참여 필요성이 줄어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실제 대부분의 대학 교수 임용기준 및 인사평가 기준에는 주저자와 교신저자로 참여한 논문에 대해서만 가산점을 부여할 뿐 공동저자 가중치는 미미하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뿐만 아니라 국책연구사업 선정기준에도 공동저자 경력은 반영되지 않는게 고착화 되다보니 연구자들이 공동저자로 참여하는 시간에 본인 연구에 열중하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서울 소재 의과대학 연구부학장은 “예전에는 공동저자에 대한 가치가 이 정도는 아니었다”며 “요즘은 공동저자 매리트가 전혀 없다보니 연구자들이 기피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고 말했다.
‘개탄’ 대신 ‘개혁’ 필요한 시점
공동저자 기피현상에 따른 연구 질 저하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아무리 좋은 연구라 하더라도 조력자가 없으면 결실 맺기 어려운 만큼 공동저자 가치가 평가절하되면 안된다는 지적이다.
실제 공동저자는 크게는 연구에 상당한 지적(知的) 공헌을 한 사람을 칭하며, 작게는 연구 설계, 데이터 수집, 자료 분석 등을 역할을 수행한다.
때문에 논문을 꾸리는 주저자 입장에서는 보다 상질의 연구결과를 도출해 내기 위해 공동저자들의 도움이 절실할 수 밖에 없다.
대구의 한 대학병원 교수는 “공동저자를 꺼리는 탓에 연구수행에 적잖은 어려움이 있다”며 “타 대학은 물론 같은 학교 내에서도 공저자 찾기가 어렵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일각에서는 “공동저자에 대한 퇴색된 가치를 탓하기 보다 의학계 스스로 공저자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노력이 수반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무임승차 등 그 동안의 관행이 작금의 사태에 이르게 한 만큼 보다 객관적이고 철저한 기준을 통해 공동저자의 가치를 재평가 받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 일환으로 전문가들은 공저자와 기여자의 명확한 구분을 제시했다. 연구진행 과정에서의 공헌도에 따라 공저자, 혹은 기여자에 포함시킬지 분리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그 기준으로는 국제 의학학술지 편집자위원회(ICMJE, International Committee of Medical Journal Editors)가 제시한 연구출판윤리가 제시됐다.
ICMJE의 연구윤리에 따르면 연구에 중요한 공헌을 한 연구자는 저자로 논문에 게재하고, 일반적인 기여를 했지만 부분적인 경우 기여자로 분류해 ‘감사의 글’에 언급토록 돼 있다.
연구수행에 기술적 도움을 줬거나 논문 작성에 기여 또는 총괄적인 지원을 한 부서의 일원 등이 기여자에 해당된다.
대한의학학술지편집인협의회 관계자는 “공동저자의 평가절하는 우리 의학자 스스로 만들었는지 모른다”며 “확실한 자격기준에 부합된 연구자를 공저자로 게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위 내용은 데일리메디 오프라인 송년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