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료 붕괴…英 환자들 절망 '해외로'
코로나19·인력난에 대기기간 폭증…무상 의료서비스 사실상 이용 불가
2023.01.25 06:53 댓글쓰기



(서울=연합뉴스) 오진송 기자 = "손이랑 무릎을 이용해 계단을 올라다녔다. 장을 보러 갈 수도 없었다. 삶은 엉망이었다."


21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영국 글래스고 출신 캐시 라이스(68)는 고관절염으로 무릎 관절 교체가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으나 18개월 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영국 공공의료 서비스인 국민보건서비스(NHS)가 인력난 등으로 마비되면서 대기 환자 수가 폭증했기 때문이다.


결국 라이스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영국에서 비행기로 2시간 반이 걸리는 발트해 국가 리투아니아로 날아가 수술을 받기로 했다.


그는 리투아니아에서 단 몇 주 만에 수술을 받을 수 있었고, 병원비로는 영국 사설병원의 절반 수준인 6천800유로(약 912만원)를 냈다. 상담 비용과 항공편, 입원 기간인 이틀분 병실비, 수술 전 검진과 물리치료 비용을 모두 합친 금액이다.


라이스는 지난주에 다른 쪽 무릎 수술을 마저 받기 위해 또다시 리투아니아를 찾았다. NHS를 통해 수술을 받으려면 3년이 걸린다고 통보받았기 때문이다.


리투아니아 병원비는 영국 사설병원보다 저렴하긴 하지만 라이스처럼 무상의료 서비스인 NHS를 이용하던 환자들의 부담이 커진 것도 사실이다.


라이스는 리투아니아에서 수술을 받기 위해 집을 팔았다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사람들을 내가 만족스러운 연금을 받거나 매우 부유한 줄 알지만 우리는 정말 고통스러워서 이곳을 찾는 것이다"며 "이것은 의료 '관광'이 아니다. 의료 '절망'이다"라고 강조했다.


라이스와 같은 병원을 찾은 영국 루턴 출신의 윌리엄 그로버(79) 씨는 고관절 수술을 받고 7천 유로(약 940만원)를 냈다.


NHS는 그가 언제 수술을 받을 수 있을지 확답을 주지 않았고, 영국 사설병원은 1만5천 파운드(약 2천3백만원)의 수술비를 요구했다. 그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리투아니아행을 택했다.


그로버는 "늘 NHS를 이용해왔다"며 "내가 사설 병원을 가는 날이 올 줄 몰랐다. 그러나 엉덩이 상태는 점점 더 나빠졌고, 나는 결단해야 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대유행, 만성적 인력 부족 등으로 NHS가 운영에 차질을 빚으면서 영국 공공 의료시스템은 극심한 압박을 받고 있다.


NHS 통계에 따르면 작년 11월 한 달 잉글랜드 대기 환자 수는 719만 명이며, 이 가운데 40만6천575명은 1년 넘게 의료 서비스를 기다리고 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작년 9월 기준 환자 60만 명이, 웨일스에서는 작년 10월 기준 75만 명이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려놨다.


상황이 이런데도 보건사회복지부(HSC) 대변인은 "국민들이 필요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쉬지 않고 일하고 있다"며 "2년 이상 기다려야 하는 상황은 사실상 없어졌다"고 말했다.


공공 의료서비스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내몰린 영국 시민들은 어쩔 수 없이 사설병원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영국 사설병원정보네트워크에 따르면 영국에서 사설 병원을 찾는 환자 수가 코로나19 유행 이전 대비 3분의 1 이상 증가했다.


문제는 영국 사설병원 진료비가 매우 높은 수준에서 책정된다는 점이다.


이런 까닭에 영국보다 병원비가 저렴한 유럽 내 다른 국가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영국 국가 통계국(ONS)은 해외 병원을 찾는 영국 시민은 2015년 기준 12만 명에서 2019년 24만 8천 명으로 갑절 이상 증가한 것으로 추산했다.


국제의료여행저널 편집장 키스 폴러드는 리투아니아, 헝가리, 스페인 병원에서 고관절 등의 선택적 시술을 받으려는 영국인들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NHS 대신 사설 병원을 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사설병원 진료비가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3천~4천 파운드 정도로 해결할 수 있는 해외 의료시설을 찾기도 한다"고 말했다.


특히 영국에서 멀지 않고 의료비도 상대적으로 저렴하며, 외국인 환자들 사이에서 평판도 좋은 리투아니아 병원의 인기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한 병원에서 정형외과 의사로 일하는 사루나스 타라세비추스는 "10년 전만 해도 영국인 환자를 찾아보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대부분 환자가 영국 출신"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이가 많은 환자들은 집에서 가까운 병원에 가야 하지만 이곳까지 온다"며 "자녀에게 돈을 빌려서 오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타라세비추스에 따르면,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 이전에는 NHS가 약 6개월 정도의 '합리적 기간' 안에 환자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할 경우 환자가 외국에서 수술을 받고 난 뒤에 NHS에 비용을 청구할 수 있었다.


그는 "브렉시트 이후에 영국 출신 환자가 줄어들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dind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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