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의료기술 발전 속에 정부는 일부 평가 제도를 개선하고 규제를 완화하며 시장 진입을 독려하고 있다.
하지만 의료계와 환자단체는 의료기술 신뢰성 저하를, 산업계는 여전히 지난한 평가 과정을 지적하며 각기 다른 방향으로의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지난 15일 서울 강남 건설회관에서 열린 한국보건의료연구원(NECA) 연례학술회의 ‘네카가 듣는다’에서 의료계와 산업계, 환자단체 등 각계 전문가들이 모여 신의료기술평가 방향성에 대해 논의했다.
이날 참석한 보건의료 전문가들은 "충분히 검증되지 않고 유효성이 확보되지 않은 의료기술은 환자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감을 피력했다.
연준흠 상계백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는 ‘신의료기술평가에 대한 이슈와 진실, 향후 방향’을 주제로 발표하며 '선(先) 진입 의료기술'을 지적했다.
선진입 의료기술은 신의료기술 평가에서 탈락했지만 안전성은 확인된 기술에 대해 일정기간 진료를 허용하고 임상 근거를 축적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연준흠 교수는 “안전성에 대한 시각차가 있는 것 같다. 정부나 산업계는 평가 유예된 의료기술이 환자에 직접적인 위해(危害)가 없으니 안전하다고 하지만 검사 결과가 잘못된 것도 환자 안전을 해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혁신의료 아닌 '미검증 혁신의료기술평가 제도' 개명
연 교수는 선진입 의료기술 제도 중에서도 혁신의료기술 평가 제도에 대해 “혁신의료라는 단어에 국민들은 대단한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제도는 아직 미검증된 의료기술을 평가하는 것이다. 제도 명칭을 미검증 혁신의료기술평가 제도라고 바꿔야 한다”고 촉구했다.
임영석 서울아산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두 번째 발표자로 나서, 선진입 의료기술 제도 중 신의료기술 평가유예 제도가 너무 느슨하다고 지적했다.
임 교수는 “지난해 신의료기술평가 유예제도가 크게 개선되면서 신청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 이유는 2년 동안 IRB가 설치되지 않은 기관에서도 진료상 거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고, 데이터 수집을 위한 연구 디자인도 강제력을 갖고 있지 않으며, 모니터링도 신청자 자체적으로 하면 된다. 더불어 완전 비급여로 환자가 전액 비용 부담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신청자가 알아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모니터링 한 것을 100% 신뢰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며 “어느 나라도 임상현장에서 데이터 수집을 할 때 자유롭게 놔두지는 않는다. 데이터의 질을 담보할 수 있도록 제도적 개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업계 “의료기술 기획에서 평가 완료까지 빨라야 10년, 기다려줄 투자자 없다”
반면 산업계는 여전히 새 의료기술이 시장에 진입하기까지는 절차가 복잡하고 오래 걸린다는 점을 지적했다.
국내 1호 디지털치료제 ‘솜즈’를 개발한 임진환 에임메드 대표는 주제 발표에서 “혁신의료기술에 선정돼도 지난한 연구수행 과정을 거쳐야 한다. 식품의약품안전처 임상시험을 거친 뒤 다시 보의연에 연구수행 계획서 제출 후 승인받는 데 6개월이 걸렸으며 이후 병원 IRB 승인을 받고, 비급여 수가 항목 코드를 등록하고, 병원 진료재료위원회 승인을 받아야 비로소 처방된다. 매스컴의 주목을 받아 빨리 진행됐는데도 연구 수행에 들어가기까지만 9개월 걸리는 셈”이라고 밝혔다.
이어 “관련 제도가 많이 바뀌고 있지만 산업계는 아직 배고프다. 하루하루가 돈이기 때문이다. 연구수행을 하는 동안 기업은 자금 압박을 견디기 어렵다. 이렇게 긴 호흡을 기다려줄 투자자가 많지 않다”고 호소했다.
의료 인공지능(AI) 기업 뷰노 임재준 법무정책실장은 평가 절차상 투명성을 제언했다.
임 실장은 “평가 관련 위원회 명단과 회의록을 공개해야 한다”며 “위원들이 특정 기업과 이해상충 관계가 있다거나 공동연구를 했는지 판단할 필요가 있다. 또 위원회 논의 내용을 알면 산업계가 더 나은 제품을 개발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신채민 보의연 신의료기술평가사업본부장은 “과거 위원회 명단과 회의록을 공개한 적이 있는데, 평가에서 탈락한 신청자가 위원들을 찾아가 항의하는 불미스러운 일들이 많이 발생해 비공개로 바꿨다. 평가 문화가 성숙되면 언젠가 다시 공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외국에서는 정식 등재된 의료기술이 한국에서만 인정받지 못한다’는 세간의 지적에 신 본부장은 “자체적으로 조사한 결과 실제로 그런 사례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보건복지부 “중간자 역할에 최선 다하겠다”
김준현 건강정책참여연구소 소장은 패널토론에서 최근 보건복지부와 보의연 평가 제도 개선을 비판했다.
김 소장은 “의료기술에 대한 규제 완화는 산업부처나 경제부처가 주장을하고 복지부나 보의연은 반대 논리를 개발하는 게 맞다. 그래야 정책 결정에서 균형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런데 건강권을 보장해야 하는 주관부처가 나서서 규제 완화를 외치는 건 심각하게 잘못됐다. 산업계 쪽으로 편향돼 있는 것 같아 상당히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이에 오상윤 보건복지부 의료자원정책과장은 “지난 8월 ‘선(先) 진입 후(後) 평가’ 공청회 후 비판 목소리가 높은 것을 굉장히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면서도 “제도 허들이 낮아지거나 등재 절차가 바뀐 것은 아니다. 본 평가는 엄정하게 하되, 잠재성이 높고 변화가 빠른 기술은 임상 근거를 쌓기 위해 유연하게 접근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산업계 쪽에서도 이런 변화에 책임감을 갖고 유효성 검증에 더 노력해주길 바란다”며 “복지부도 경제부처와 산업계, 의료단체와 환자들 목소리를 종합해 판단하는 중간자적 입장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