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 숙원과제였던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심사실명제가 지난 10월부터 시행됐다. 이른바 ‘깜깜이 삭감’에서 벗어나 보다 진중한 고민과 의료 공급자의 알권리 측면에서 긍정적인 해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가야 할 길이 멀다. 현재 적용되고 있는 과별·지원별 20여 명의 대표위원 성명을 기재하는 1차원적인 심사실명제는 실효성이 부족하다. 90명의 상근심사위원, 1000명의 비상근심사위원 이름이 모두 기재되는 것이 바로 심사실명제 완성인데 현실은 쉽지 않다.
심사실명제 의미
심사실명제 도입은 심평원 차원에서도 공감했던 사안이다. 책임 소재가 모두 심평원 심사직에게 쏟아지는 상황이 발생하다 보니 원활한 소통이 진행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삭감을 결정한 심사위원의 이름을 공개하면서 책임감을 부여하고 의료계와의 신뢰감 형성을 강조하는 의미로 해석되는 심사실명제 의미는 큰 상태다. 일련의 국정감사에서도 심사 투명성 확보를 위해 심사실명제 도입을 요청하기도 했다.
실제로 작년 국정감사에서 김승택 심평원장은 심사실명제 도입에 대한 운을 뗐다. 당시 김승택 원장은 “의료계의 불만을 잘 알고 있다. 이번에 상근심사위원을 포함한 심사실명제를 도입해 심사평가에 대한 투명성을 강화하려고 한다. 심사조정 내역을 투명하게 밝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근본적으로 ‘왜 삭감이 됐는지’ 이유를 알고 싶을 때 삭감을 결정한 전문가의 의견을 들을 수 있도록 창구를 열어준다는 측면에서 심사실명제 도입에 대한 고민이 의정협의체 등을 통해 공유됐고 제도 자체로써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올 상반기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준정부기관 경영실적 평가에서 심평원은 종합평수 ‘A등급’을 획득했는데 주요 요인 중 하나가 심사실명제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심사 투명성 및 책임감을 강화해 요양기관의 심사 수용성을 높일 수 있는 근거로 판단돼 등급이 올라간 것이다.
심평원 송재동 개발상임이사은 금년 2월 기획조정실장 재직 당시 “의료계가 심사실명제를 꾸준히 요구하고 있다. 본원과 지원 간, 심사위원 간, 심사직원 간 심사결과를 상시 모니터링 하고, 심사위원 심사실명제를 단계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심평원 김선민 기획이사 역시 지난 5월 “심사 품질을 높이기 위해 심사실명제를 도입하고 근거 중심의 심사결정문을 작성해 이를 사례로 집적하고 그후 다시 기준으로 만드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의료계 요구에 부응할 수 있도록 심평원과 의료계 간 진정한 소통 창구도 마련하고 이를 제도화하는 방식이 중요한데 심사실명제가 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결국 심사실명제는 의료계와 심평원이 서로 도움이 될 수 제도라는 인식을 갖게 됐고 10월부터 대망의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제도 도입 후 어떤 변화 생겼나
복지부는 ‘요양급여비용 심사·지급업무 처리기준’ 개정안을 고시를 통해 10월 시행을 확정했다.
주요 내용은 기존 요양급여비용 심사결과 통보시 심사담당자의 성명과 전화번호 등 정보와 함께 심사조정 결정에 참여한 심사위원의 실명을 기재하도록 한 것이다.
심사결과 통보서 확인 후 구체적인 심사 내용이나 이유 등에 대한 궁금증이 있는 경우, 요양기관이 해당 정보를 활용해 심사 과정에 참여했던 전문가에게 그 사유를 직접 문의할 수 있도록 나름의 문을 열어준 셈이다. 10월부터 요양급여비용 심사결과 통보서에 변화는 발생했다. 심평원은 상근심사위원 중 각 분야 대표를 선정해 이름을 기재했다.
본원 소속 18개 진료과별 대표위원을 선정했고, 10개 지원 마다 한 명씩 총 10명의 대표위원을 정했다. 다만, 진료과별 18명의 위원 중에는 분야별 업무를 중복으로 맡는 위원도 존재한다.
구체적으로 심평원 본원은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한방 하상미 위원 ▲안·이비인후과, 피부·비뇨기과 장혁순 위원 ▲치과 손흥규 위원 ▲혈액종양내과1 이홍복 위원 ▲혈액종양내과2 조경삼 위원 ▲호흡기알레르기, 내분비·대 사내과 최희경 위원 ▲감염내과, 신경과, 진단검사의학과, 병리과 최희경 위원 등으로 구분됐다.
심평원 지원에는 ▲서울지원 김학주 ▲부산지원 김종원 ▲대구 지원 박병철 ▲광주지원 정성수 ▲대전지원 이건수 ▲수원지원 정현기 ▲창원지원 권해영 ▲의정부지원 박용수 ▲전주지원 정석구 ▲인천지원 박현선 지역심사위원장이 대표위원 명찰을 달았다.
의료기관은 불합리한 삭감 등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선적으로 20여 명의 대표위원에게 삭감을 결정한 이유와 근거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권리가 생겼다.
해당 고시 개정안은 10월1일을 기준으로 매 3년이 되는 시점(매 3년째의 9월 30일까지)마다 법령이나 현실 여건의 변화 등을 검토해 고시의 폐지, 개정 등의 조치를 하도록 했다.
아직 반쪽짜리 실명제, 확대과정 촉각
긍정적 분위기가 형성되는 심사실명제이지만 속내를 들여다 보면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의료현장에서는 뚜렷한 변화가 발생하지 않고 있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경기지역 내과 개원의 A씨는 “별반 달라진 부분이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대표위원만으로 구성된 심사 실명제는 큰 의미가 없다. 이미 알고 있는 지역심사위원장의 이름만 기재된 상황”이라고 밝혔다.
서울소재 종합병원 보험심사팀 B씨 역시 “과별로 구분된 심사위원의 이름이 담겨있지만 실효성을 확보하려면 전체 심사위원으로 확대돼야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는 현재 심사실명제가 누구나 다 확인이 가능한 대표 위원으로 구성됐기 때문에 실질적 심사실명제라고 보기에는 한계점이 존재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심평원 차원에서는 단계적 확대 방안을 설계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부담되는 부분이 존재한다. 비상근위원까지 이름공개가 확대되면 관련 업무를 맡겠다는 지원자가 현격히 줄어들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심평원 관계자는 “단계적 확대가 현명하다. 무리하게 심사 실명제를 확대 적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가뜩이나 심사 투명성 제고에 대한 압박이 가중되고 있는데 비상근위원까지 이름을 공개하고 심사결정에 임하라는 것은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우선적으로 대표위원을 중심으로 적용해 보고 추이를 보고 확대하는 과정을 밟을 계획이다. 전문성, 투명성 제고를 위한 방향성을 확립된 상태이니 문제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모색하며 제도를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심사실명제 도입과 관련 직접적 이해관계자인 의협 역시 심평원의 단계적 확대 방안에 대해서는 공감한다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의협 최대집 회장은 “의협의 지속적인 요구로 심평원이 심사 담당자의 이름을 명시하는 심사실명제가 도입됐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조치입니다. 심평원의 이런 노력이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계속 지켜보고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의협 심사기준개선 특별위원회 이필수 위원장 역시 “현재 대표위원을 중심으로 한 심사실명제는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심평원이 확대 방안을 고심한다고 했으니 지금은 이 과정을 믿고 추후 변화에 대해 촉각을 세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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