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어렸을 때 강원도 북부 동해안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당시 귀경하던 중 유턴할 곳을 못 찾아 헤매다가 양양공항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어차피 먼 길 온거, 경험 삼아 보고자 양양공항 입구까지 들어갔다.
그런데 공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한산해서 의아했다. 적막감까지 느껴졌다. 공항 구경이라는 기대감을 가졌던 애들한테 딱히 설명해줄 게 없었다.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휑한 공항을 뒤로 하고 곧장 나왔다.
이후 언론에서 양양공항을 두고 소위 ‘유령공항’, ‘1년 수백억 적자공항’ 등의 기사를 보게 됐다. 경영이 어려울 것이라는 예감은 했지만 실상이 생각보다 심각한 측면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감이 치밀었다.
정부가 왜 저런 정책을 추진는지 이해가 안됐기 때문이다. 건설비 등을 포함해 수천억원의 예산이 소요되는 공항을 어떻게 기획했기에 저런 예측도 못하고 건립했는지 참으로 답답했다.
그렇다고 누구하나 책임지는 사람도 없다. 혈세(血稅)가 이런 식으로 낭비되는 실정을 보면 우리나라는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돈 새는 구멍이 너무 많다는 가담항설(街談巷說)이 맞는 격이다. ‘세금=눈먼 돈’이라는 인식에 기반해 먼저 빼먹는게 임자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이런 실정인데도 정부가 금년 1월말 전국 주요 시도의 23개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에 대해 24조1000억원 규모의 예비타당성 조사(이하 예타)를 면제하고 조기 착수키로 했다.
이번에 면제된 대상은 대부분 도로, 철도, 공항 같은 건설사업이다. 내수 및 투자가 위축돼있고 고용이 부진한 상황에서 소위 토건사업을 통해 경기를 부양하고 지역경제 활성화 및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정부는 국가 균형발전도 고려했다는 설명을 곁들었다.
하지만 정부의 이번 결정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같은 정책이 단기적인 약발은 있지만 장기적으로 효율성이 많이 떨어지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주지의 사실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예타 면제 정책의 태반이 경제적 측면에서는 권고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정부가 부실투자를 감행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논리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 이 작은 나라에 제2의 양양공항이 몇 개나 또 생겨날 수 있다. 예타 면제로 동남권신공항 건립이 다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TK와 PK지역 간 첨예한 갈등을 초래했던 사안이다.
여기에 전북지역 새만금공항도 건립될 예정이다. 지근거리에 무안공항이 있는데 새 공항을 짓겠다는 발상이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무한공항 역시 폐쇄가 검토될 정도로 경영이 악화돼 있는 실정이다. 국민 돈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의 낭비가 불 보듯 뻔하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오비이락(烏飛梨落)일까. 최근 의료계와 정부의 협상이 오버랩됐다.
대한의사협회가 의원급 진찰료 30% 인상 및 처방료 부활 등을 요구했지만 정부가 거절했다. 이에 대한의사협회는 정부와의 협상을 전면 중단하고 강력 투쟁 등 일전불사 태세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대한의사협회가 의원급 진찰료 30% 인상과 처방료 부활 등을 요구한 것과 관련, 금년 1월말 기자간담회에서 어렵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박 장관의 거절 요지는 다음과 같다. “진찰료 인상 및 처방료 부활은 막대한 건강보험 재정이 소요되고, 약제비 등 추가적인 부담을 발생시킬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단순히 진찰료 등을 인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보다는 환자에게 필요한 교육·상담 제공, 내실 있는 만성질환 관리 등 진찰의 실질적인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의원급 교육상담 확대, 만성질환관리 등 제도 개선과 병행해 수가 인상 등이 논의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였다.”
이와 관련, 의료계는 강하게 반발했다. 최대집 의협 회장은 “수가 정상화는 현 집행부에서 해결해야 할 숙제다. 다음 집행부는 고민이 없도록 모든 계획을 세웠고 실행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러면서 수가 정상화 3단계 추진방안을 밝혔다.
그는 “정부에 1단계 과정으로 진찰료 30% 인상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때문에 의협 집행부는 정부와의 모든 대화를 중단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의료계는 지금 좌절, 분노, 불신이 쌓여있다. 이 울분을 한곳에 모아서 제도 개혁을 위해 함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대정부 투쟁을 강조했다.
의협이 요구하는 진찰료 30% 인상과 처방료 부활 등에는 명확한 기간이 설정되지 않았지만 3조원 정도 소요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의료계 종사자가 의사만 10만명이 넘고 간호사와 조무사 90여 만명, 여기에 다양한 직종의 종사자 등을 합치면 족히 150만명은 추계된다. 이런 상황을 가정하면 3조원이 과연 정부가 감내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돈인지 의구심이 든다.
더욱이 정부는 공개적인 석상에서, 대통령까지 적정수가 보장을 언급하지 않았던가. 단호히 거절하는 정부의 모습보다는 “1조원(요구액 3분의 1) 정도는 쓰겠다”며 안(案)을 제시, 격앙된 의료계를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내지 못하는 전략이 아쉽다.
이번에 정부가 결정한 예타 목록에는 조(兆) 단위가 넘는 단일사업이 넘쳐난다. 그런 예타 목록을 보면서 종사자 150만명은 물론 전반적인 국민건강에 직결된 사안인데, 복지부 장관 표현처럼 3조원이 막대한 재정이어서 협상이 파탄난 것이 정말로 안타깝다. 한편으로는 의료계가 이런 정부논리에 정교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방식 역시 아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