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디 양보혜 기자] 우리는 마음이 슬프거나 우울할 때 그 원인을 찾아나선다. 문제 원인을 알면 이 같은 불편한 감정들을 걷어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노, 슬픔, 질투, 불안과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우리 '정신건강'이 튼튼하다는 증거로, 있는 그대로 포용하자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바로 신경 인류학자이면서 정신건강의학 전문의인 박한선 교수[사진 左]다. 최근 '마음으로부터 일곱 발자국'을 출간한 박 교수를 만나 마음의 고통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에 대해 들어봤다.
Q.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서 인간의 마음에 관심이 많았다. 이를 알기 위해 분자생물학과 같은 미시연구를 하기도 했다. 세포 내 신호전달 연구를 통해 인간의 정신질환, 마음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여겨서다. 그러나 진행한 연구들이 잘 안 됐다. 2012년 서울대 의대 박사 과정을 그만두고 연구방향을 바꿔 인류학을 전공하게 됐다. 한국은 외국에 비하면 인류학이 일천하다. 특히 신경인류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현재 이 분야는 전패러다임 상태에 놓여 있다. 다양한 가설들이 병존하는 상태인데, 이 말인즉슨 '잘 모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생소한 분야이지만, 인간이 가진 마음을 인간의 뇌가 수행해온 진화적 과업이라는 '신경인류학' 관점에서 이야기 나누고 싶어 글을 썼다.
Q. '감정이 진화의 산물'이라는 개념이 다소 낯설다
우리는 몸(신체)이 환경 변화에 따라 진화한다는 개념은 직관적으로 잘 받아들이지만, 정신의 진화에 대해선 심리적 거리감을 느끼는 것 같다. 정신하면 영혼과 같이 본질적인 뭔가가 따로 있으면 하는 소망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특징 중 하나는 정신, 뇌 기능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군집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관계 속에서 복잡한 정서, 감정, 사고, 판단, 언어 능력을 갖게 됨에 따라 뇌가 더 커졌다.
"슬프고 우울한 감정은 마음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한 '통증' 일환"
"대신 열이 심하면 약을 먹득 우울이 심해지면 진단을 받고 약 복용 및 치료 받아야"
"정신보건법이 바뀌면서 입원이 과거에 비해 더 어려워진 측면 안타까워"
Q. 기쁨, 행복과 달리 우울, 분노 등의 감정을 느끼면 바로 벗어나고 싶다. 책에서는 다른 관점 제시하던데
사람들이 우울하거나 슬픔을 느끼면, 고통의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그 과정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이뤄진다. 첫째는 내면에서 원인을 발견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부족하다거나 열등하다고 여기며 자기 비하 혹은 자책한다. 다른 방식은 외부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어린시절 부모 학대, 친구들로부터 따돌림 당한 경험, 더 나아가 사회구조, 자본주의, 세계화와 같은 외부 세계에서 감정 변화의 원인을 찾는 것이다. 원인을 파악한 뒤에는 고통스럽고 불편한 감정을 제거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런 감정들은 건강한 반응이다. 우리 몸에서 발생하는 '통증'과 같은 역할로 보면 된다. 통증은 일종의 방어기제다. 통증을 못 느끼면, 죽을 수도 있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슬프고 우울한 감정은 마음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한 '통증'으로 봐야 한다. 따라서 부정적인 감정을 무작정 없애려고 하기보단 인간성의 본질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겪는 갈등과 다양한 감정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Q. 그럼 우울할 때 약을 복용하면 안 되나
아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우울과 분노는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생기는 일반적인 감정을 말한다. 열이 심하면 약을 먹어야 하듯, 우울이 심해 우울증으로 진단을 받았다면 약을 복용하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
Q. 관계가 단절되고, 사회가 각박해지면서 부정적인 감정이 증폭된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경쟁적인 문화, 개인주의, 공동체의 해체, 자본주의 등이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다. 하지만 초창기 인류는 늘 행복하고 즐거웠을까. 서로 존중하고 항상 진실했을까. 앞서 말했듯 우리 마음에 존재하는 비합리성, 변덕스러움은 인간성의 본질에 가깝다.
Q. 마음에 상처가 있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이 위협을 받는 사건들이 빈발한다
안타깝다. 정신질환자에 의한 병원 내 폭행 사건이 사회적 이슈가 됐다. 정신보건법이 바뀌면서 입원이 과거에 비해 더 어려워졌다. 가족이 챙겨주지 않는 환자 중에 관심을 받지 못하는 환자들이 예전보다 늘어나면서 생겼을 수도 있겠다는 조심스런 생각이 든다.
Q. 향후 계획은
인간의 마음을 뇌(腦)의 진화로 보는 가설들을 입증하는 연구를 할 예정이다. 이를 테면 개는 우울, 슬픈 감정을 느끼는데 늑대는 못 느낀다. 개의 조상은 늑대인데, 왜 이런 차이가 날까. 가축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문명사회에 살게 되면서 치러야 하는 대가 중 하나가 정신적 고통일 수 있다. '마음의 고통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요인'이라는 가설들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연구를 계속 이어나갈 계획이다. 아직 초창기인 신경인류학(진화정신의학)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
※ 박한선 교수는 경희대 의대 졸업 후 분자생물학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호주 국립대학 ANU 인문사회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강사, 서울대학교 의생명연구원 연구원, 성안드레아병원 과장 및 사회정신연구소 소장, 동화약품 연구 개발본부 이사 등을 지냈다. 지금은 서울대학교 인류학과에서 진화와 인간 사회에 대해 강의하며, 정신의 진화과정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