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디 박정연 기자] #서울에서 척추전문병원을 운영 중인 A원장은 최근 뜻밖의 송사에 휘말렸다. 환자에게 비급여 항목인 추간판 고주파 열치료술을 하던 중 일부 절제가 필요한 부분을 발견했고, 그대로 절제술을 시행했다. 얼마 후 보험사는 A씨에게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절제가 수반된 수술이었기 때문에 이는 급여항목인 추간판절제술에 해당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당황스러워 환자에게 연락을 취해 보니 문제없이 실손보험금을 수령했다. 하지만 보험사가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사실은 몰랐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재활의학과 전문의 B원장 역시 보험사로부터 최근 민사소송을 당했다. 환자의 급성 통증을 치료하며 비급여항목 의료기기인 ‘페인스크램블러’를 사용했는데, 건강보험급여 항목에 등재된 ‘만성 통증’이 아닌 급성 통증에 사용한 것은 비급여 항목으로 봐야 한다며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B원장 환자 역시 별다른 잡음 없이 보험사로부터 실손보험금을 지급 받았다.
"과잉진료를 했다"며 부당이득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하는 실손보험사로 인해 개원가가 속을 끓이고 있다.
환자에게는 군말 없이 보험금을 지급하고 소송 사실도 알리지 않은채 마땅한 보호기전이 없는 병원을 상대로 실손보험사가 소송을 제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25일 의료계에 따르면 다수의 개원의들이 보험사로부터 민사소송을 당해 재판을 진행 중이다.
고도일 서초구의사회 회장은 “최근 실손보험사와의 소송 문제와 관련된 민원이 폭증하고 있다”며 “의사는 의학적인 근거에 의해 치료를 했지만 보험사는 과잉진료라고 주장하고 있어 서로 이견이 많다”고 말했다.
이어 “사실 실손보험금 지급 문제는 보험사와 환자가 풀어야 할 문제인데, 보험사들이 병원에 소송을 걸기 때문에 병원과 보험사의 문제가 된다”고 덧붙였다.
다른 의사단체 A법제이사도 비슷한 입장을 전했다.
그는 "소송을 당한 회원들과 관련한 회무가 급증하고 있다"며 "특히 페인스크램블러와 관련해 올해 초부터 손보사가 대대적인 소송을 걸기 시작해 재판 중인 회원이 수십 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보험금을 미지급할 경우 환자는 금융감독원에 민원을 제기해 보험사를 압박할 수 있지만, 호소할 수 있는 마땅한 창구가 없는 병원은 그대로 송사에 휘말릴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법원에서는 주로 합의를 권한다. 급여항목 허가 여부와 의학적 견해가 충돌하는 경우가 많아 판단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페인스크램블러의 예가 대표적이다. 식약처 허가 사항에는 해당 기기를 만성 통증에 대해서만 사용해야 한다고 정해져 있지만 의료 현장에서는 만성 통증과 급성 통증을 명확히 구분해 치료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의사들 입장에서는 소송을 오래 진행하는 게 힘들고, 승소율도 절반 정도에 그쳐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합의를 선택하게 되는 경우도 다반사다.
페인스크램블러와 관련해 소송을 진행 중인 한 변호사는 "최근 유사한 사건에서 의사 손을 들어 준 판결이 나왔지만 판례를 보면 승소율은 50%정도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고도일 회장은 “보험사들도 형사사건은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해석 여지가 다분한 민사소송을 건다”며 “의사 입장에서는 최선의 수술을 한 건데 왜 이런 일을 겪어야 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이처럼 ‘환자는 건너뛰고 병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보험사들의 행보는 법적으로도 적절치 못하며, 또 무엇보다도 의사의 소극적 진료행위를 야기해 결국 환자에게 피해가 돌아간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고한경 유앤아이파트너스 변호사는 “환자가 본인의 권리인 행사청구권조차 모르고 있는데, 병원이 부당이득청구를 하는 게 합당한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번 소송을 경험한 의사들은 의료현장에서 심리적 위축감을 갖게 되는데, ‘최선의 진료를 시행해야 한다’는 관점에서도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꼬집었다.
한편, 개원가에서 고충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대한의사협회도 대책 강구에 나섰다. 소송을 걸기 전에 의협의 주선 하에 보험사와 의사 간에 중재 과정을 거치게 하는 방안을 고려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의협 관계자는 “실손보험청구 관련 소송을 겪는 회원들이 많아지며 내부적으로 대책 마련을 서두르고 있다”며 “회원들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는 중재과정을 마련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와 관련해서 금년 5월 손해보험사협회측과 이야기를 나눴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며 “다만 손보협 쪽에도 여러 회원사가 있는 만큼 조율 과정을 더 거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