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1년 4월 서울아산병원 중환자실 최상호 감염관리실장은 산모들이 집단적으로 원인 미상의 폐질환으로 사망하자 황급히 질병관리본부에 새로운 감염병 유행이 의심스럽다며 역학조사 신고를 했다. 그로부터 벌써 9년여 시간이 훌쩍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특히 제도 개선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는 관련 법안 발의가 중요하지만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법 통과를 둘러싸고는 오랜 시간 첨예한 논쟁이 벌어졌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이후 우리 사회에는 어떠한 변화의 바람이 불었을까. [편집자주]
일찌감치 시작된 비극…공정위 신고에 끝나지 않은 논쟁
가습기살균제 사건은 20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30대 산모 7명이 폐질환으로 서울 소재 한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원인은 불명. 그런데 이 중 4명이 치료 도중 사망하면서 참담한 비극이 시작됐다.
현재까지 알려진 사망자만 1400명이 넘는다.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한 사람 중 사망하는 원인은 대부분 중증 폐섬유화증이다. 그런데 사망자를 대상으로 전수조사를 해보니 천식을 앓는 환자도 많았다.
그 해 8월, 질병관리본부는 이들의 폐(肺) 손상 원인으로 가습기 살균제를 지목하는 역학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후 10월에 피해자 가족 등은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 판매한 업체들을 조사해달라며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했다.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 신속히 조사에 착수한 공정위는 "안전한 성분을 사용한 것처럼 허위·과장 표시했다"며 옥시레킷벤키저 등 3개 회사를 검찰에 고발하고 과징금을 부과했다.
그러나 애경산업·SK케미칼 2개 회사에 대해서는 ‘이들이 판매한 가습기 살균제 용기에 인체에 무해하다는 광고가 없고 인체 유해성과 관련한 어떤 표시·광고도 없다’며 무혐의로 2012년 3월 조사를 마무리했다.
이와 관련, 가습기살균제 환경노출확인피해자연합 박혜정 대표는 “정부는 피해자들을 위한 배상 및 보상을 가해 기업에게 명령해야 함에도 그러지 않았다”며 “정부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태가 지금도 마무리되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가해 기업과 별도로 피해자에 대해 일괄 배상하고 더 이상 치료를 못 받고 사망하는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게 골자다.
박 대표는 “치료비가 없어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도록 국민건강보험 체계와 연계해 치료비를 지불하지 않고도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체계를 갖춰달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실제로 가습기 살균제 참사 사건이 발생한 지 벌써 9년이 됐지만 피해 사망자는 계속 늘어나면서 분노는 사그라 들지 않고 있다.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는 최근 전북지역 피해자 추모대회에 참석해 “지속적인 노력으로 피해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에 국회가 나서서 해결책을 찾아야만 한다. 피해자들의 고통만 가중될 뿐 속시원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고 성토했다.
김선홍 글로벌에코넷 상임회장은 “가습기살균제 참사에 관해 책임 회피와 함께 면피 기업 애경은 이 제품을 사용하던 많은 소비자들이 죽거나 건강에 문제가 생겼음에도 9년간 배상은 커녕 공식 사과조차 거부했다”고 말했다.
검찰 고발에도 피해자 속출…군에서도 다수 위험 노출
지금까지 가습기살균제로 병원을 찾은 환자들은 대부분 호흡곤란이나 폐렴, 통증 등의 증상을 보였다.
하지만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했어도 별다른 증상이 없는 사람도 많다. 문제는 폐의 일부가 손상됐어도 자각 증상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험성 때문에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는 지난 2018년 11월 27일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의 전·현직 임직원들 14명을 검찰에 고발했다.
피해자들의 시위와 요청이 계속되자,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은 제3차 회의에서 의결된 건강피해 미인정자(현 폐섬유화 3.4단계 판정자)에 대한 피해구제계획에 따라, 2017년 10월 27일에 열린 제 4차 회의에서 특별 구제 신청자 109명 중 95명을 지원 대상자로 선정했다.
이후 제5차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위원회를 열고 가습기살균제 건강피해 미인정자 특별 구제급여 지급 등을 심의했다. 위원회는 5차 회의에서 특별구제 추가 신청자 29명 중 20명을 지원대상자로 선정했다.
이 과정에서 6명의 천식 환자도 지원금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금액은 정부구제 대상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구제급여와 동일한 수준이며 의료비, 요양생활수당, 간병비, 장의비, 특별유족장의비, 특별유족조위금, 구제급여조정금 등 총 7가지 항목으로 구성됐다.
그러던 중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곳이 새롭게 드러나기도 했다.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는 군대에서 약12년 동안 가습기살균제를 광범위하게 사용했음을 파악했다. 특조위는 복무를 했던 국군 장병들이 가습기살균제 위험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특조위는 군의 가습기살균제 사용 실태에 관한 조사를 진행한 결과 2000~2011년 육·해·공군과 국방부 산하 부대·기관 12곳에서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범위 확대 두고 정부 회의론
물론 정부가 이렇게 심각한 사안에 대해 그저 무방비 상태로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선, 환경부에서는 2016년 가습기 살균제 피해 폐질환 심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는 가습기살균제에 따른 폐질환 판정 기준을 세우고, 피해자를 살리기 위한 제도를 마련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그리고 이듬해 11월에는 가습기살균제 피해 천식 판정위원회가 꾸려졌다. 결핵및호흡기학회, 직업환경의학회, 소아청소년학회, 알레르기학회 등 4개 학회들이 연합해 12개 대학병원 소속 교수 30여명이 함께 활동했다.
그 결과 지난해 말부터 1019년 7월까지 심사판정을 신청한 환자는 6000명이 넘는다. 판정단은 정밀 분석을 시행해 지금까지 340여 명이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천식이 발생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했다.
하지만 그 간의 갈등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2011년 가습기 살균제의 원료 위험성이 발표된 이후 사과문과 피해자를 위한 보상까지 합의를 보는 데 생각보다 진척이 느렸다.
일차적으로는 판매 기업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사실을 알고도 제품을 판매한 탓이 크지만 정부가 그 여파를 관리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제기됐다.
당정,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전원 구제 추진
다행히 9월24일 더불어민주당 신창현 의원의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법’ 개정안이 사실상 통과를 목전에 두면서 가습기 살균제 관련 질환자들이 차별 없이 구제받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최근 국회에 따르면 당정이 질환에 따른 가습기 살균제 피해 단계 구분을 철폐하고 이원화 체계인 피해자 구제 방식을 일원화하는 법안을 마련했다. 또 향후 기업 대상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있어서 피해자들이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 책임도 크게 축소된다.
구체적으로 개정안을 보면 가습기 살균제 관련 질환자들이 질환 종류에 상관없이 모두 건강 피해자로 인정받고, 피해자 차별 논란을 빚어온 구제급여·구제계정이 ‘피해구제기금’으로 통합된다. 재원은 기업 분담금과 매년 정부가 출연하는 기금이다.
중증 폐질환에 명확한 인과관계를 보인 옥시레킷벤키저 가습기 살균제 사용자들만이 우선적으로 구제받았지만 앞으로는 SK케미칼·애경산업 제품 사용자도 법적 피해자 지위를 보장받게 되는 것이다.
신 의원은 “정부도 습기 살균제 위험성을 안전하게 관리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며 “기업이 따로 맡았던 피해 보상 책임을 정부도 함께 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향후 기업을 대상으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도 피해 입증 책임이 크게 완화된다. 손해배상액 산정은 피해자가 배상액을 입증하기 곤란하면 법원이 변론 전체 취지와 그간 조사한 결과에 기초해 배상액을 추정해 결정하도록 했다.
또 현행법은 피해자가 상당한 피해 인과관계를 입증해야만 그 피해를 인정해 줬다면 개정안은 가습기 살균제 노출에 따른 건강상 피해를 입었을 때 인과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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