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디 박민식 기자] “대구의 한 신경과 전문의가 10년 간 치매를 앓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뇌를 기증한 일이 있었다. 기증자 형제분도 모두 치매를 앓았고 기증자 본인과 아들에게도 유전적 영향이 있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아버지 사망 후 아들인 신경과 전문의는 치매 관련 연구에 도움이 되고자 사후 뇌기증을 결심했고 다른 가족들도 선뜻 동의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뇌기증 사연을 묻는 질문에 대한 김종재 한국뇌은행 은행장(울산대의대 병리학 교수)의 답이다.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퇴행성 뇌질환자 증가는 국가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대표적 뇌질환인 치매의 경우 잇단 임상시험 실패와 콜린알포세레이트 효능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치료제 개발이 쉽지 않다.
또한 인간의 뇌는 동물 뇌와 차이가 있어 동물을 이용한 연구 성과를 인간에게 동일하게 적용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뇌질환 치료에 대한 연구를 위해 인간 뇌자원 확보가 중요한 이유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설립된 것이 한국뇌은행이다. 의료계 종사자들에게도 낯설지 모를 한국뇌은행은 인간 뇌자원이 필요한 연구자들에게 양질의 뇌연구 자원을 제공하기 위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2014년 한국뇌연구원 산하기관으로 개소했다.
지난 2017년부터 한국뇌은행을 이끌고 있는 김종재 은행장은 국내 신경병리의 개척자인 故지제근 교수의 제자다. 초대 한국뇌은행장인 지 교수가 한국뇌은행 사업을 궤도에 올려놓고자 했던 유지(遺志)를 이어받아 은행장을 맡고 있다.
김 은행장은 “선진국들과 비교하면 뇌은행 설립은 적어도 30년 이상 늦었다”며 “유럽 뇌은행 중 가장 성공적 모델로 평가받는 네덜란드 뇌은행은 1985년 설립돼 약 4500증례의 전뇌 조직을 수집해 보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일본은 1967년 개소한 니가타 대학 뇌연구소 내 뇌은행에서 약 3500증례의 전뇌 조직과 2만점의 생검조직을 보유하고 있으며 브라질은 상파울루 의과대학 내 뇌은행에 약 300여 명의 전뇌를 보관하고 있다.
아울러 미국의 브레인 이니셔티브, 일본의 브레인 마인즈, 유럽의 인간 뇌 프로젝트 등 국가 차원의 뇌연구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해외에서는 뇌은행의 역할도 함께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여타 국가에 비해 늦은 출발에도 불구하고 한국뇌은행은 뇌자원 확보 루트 다양화를 통해 국민건강 증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실제로 다른 나라의 뇌은행들이 대부분 단독으로 뇌자원 확보 및 분양체계를 구축해 운영하고 있는 것과는 차별화된 방식이다.
김종재 은행장은 “한국뇌은행은 질병관리본부로투터 인체유래물은행 허가를 받아 생전 인체 뇌자원을 확보하고, 권역별 협력병원뇌은행을 선정‧육성해 사후 시신뇌연구자원을 확보하고 있다”며 “이런 특장점을 통해 궁극적으로 한국인 생애전주기 뇌질환에 대한 자원을 확보하고 연구를 지원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한국뇌은행은 현재 서울아산병원, 부산백병원, 전남대병원, 강원대병원, 칠곡경북대병원 등의 권역별 협력병원과 구축한 네트워크를 통해 사후 뇌기증을 받아 뇌자원을 보존하고 있다.
올해 증례가 100건을 넘어 2019년 10월까지 118명에 이르렀다. 사후 뇌기증 희망자도 979명이 등록된 상태며 혈액, 뇌척수액, 생검조직 등 총 1080여 증례의 인체뇌자원도 확보했다.
지난 해부터는 뇌자원 통합정보시스템을 구축하고 한국뇌은행네트워크 포털을 통해 총 19건의 뇌자원을 분양했다.
"우리나라 시작은 늦었지만 국민건강 기여 가능토록 노력"
관련 법률 미비로 뇌자원 활용 제한적 아쉬움···"국민들 뇌기증 인식 제고" 당부
이처럼 한국뇌은행은 차근 차근 성과를 쌓아가고 있지만 관련 법률의 미비로 인해 제대로된 순기능을 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김종재 은행장은 “현재 시체 해부 및 보존에 관한 법률에는 제한적 목적으로만 사후 뇌연구자원을 이용할 수 있는 등 뇌은행 운영에 대한 충분한 법적 근거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라고 아쉬움을 피력했다.
현행 시체해부 및 보존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사인의 조사와 병리학적, 해부학적 연구목적으로만 시신뇌자원을 이용할 수 있고 그 목적 이외에는 타인에게 양도도 불가능하다.
그는 “현재 복지부와 과기부가 관련 법 개정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앞으로는 제대로된 법적 틀 안에서 뇌은행이 운영되고 뇌연구자원을 이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기대감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김 은행장은 뇌 기증에 대해 국민들이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사후 뇌기증에 대해 정서적으로 많은 부담을 느껴 뇌자원 확보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앞으로는 대중들이 뇌기증에 대해 긍정적인 관심을 갖고 사후 뇌기증이 활성화 되길 희망한다. 뇌기증은 뇌질환 환자들을 도울 수 있도록 하는 고귀한 첫 단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