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디 박정연 기자] 일회용품 의료기기 사용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되기 이전 흡인용 바늘(천자침)을 재사용한 의사에 대한 업무정지처분은 부당하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명확한 지침이 없는 상황에서 의료인 판단 하에 관행적으로 재사용이 이뤄졌던 국내 실정을 고려한 판단이다.
또 해당 의사가 재사용하기 전에 적절한 소독조치를 하고, 재사용을 하는 과정에서 부당하게 요양급여를 청구하지 않은 사실도 판단의 근거가 됐다.
11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전고등법원 2행정부(재판장 신동헌)는 일회용품 의료기기를 재사용했다는 이유로 면허정지 처분을 받은 의사 A씨 관련 소송에서 원심 판결을 깨고 최근 처분을 취소했다.
앞서 보건복지부는 A씨가 일회용 급속성 척추천자침을 재사용 했다는 이유로 2018년 1개월의 업무정지 처분을 내렸다.
A씨는 경막상 주사와 척추 후지내측지 신경 차단술을 시행하면서 천자침을 사용했다. 천자침은 비닐봉지에 1개씩 포장돼 있고, 포장지에는 '본 제품은 일회용 멸균 의료기기임'이라고 기재됐다.
A씨는 천자침 고온 고압 멸균기인 '오토클레이브'에 멸균 소독을 하고 통상 1~3회 재사용했다.
처분 2년 전인 2016년 현지조사에서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국민건강보험공단은 A씨에게 주의를 줬고, 이후로는 천자침을 재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보건복지부는 A씨가 일회용 의료기기를 재사용하며 의료인의 품위를 손상시키고 비도덕적 행위를 했다며 업무정지 1개월 처분을 내렸다.
현행 의료법 66조는 의사가 품위를 심하게 손상시키는 행위를 할 때는 최대 1년 먼허자격을 정지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예를 들어 비난가능성이 높은 ‘비도덕적 진료행위’ 등이 해당한다.
1심은 이같은 복지부 처분이 정당하다고 판단했지만 2심 판단은 달랐다.
2심에서 A씨 변호인 측은 일회용 의료기기 재사용을 법적으로 제재하지 않는 해외 사례를 제시하며 당시 명확한 규정이 없던 국내 상황을 설명했다.
또 A씨가 소독작업을 철저히 하고 부당한 요양급여를 수급하지도 않았단 점도 강조했다. 이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A씨 행동이 의료인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비도덕적 진료행위’라 보기 어렵다고도 주장했다.
"올 9월 의료기기 재사용 관련 법 실시, 의료인들 주의 필요"
이 사건을 맡은 김연희 법무법인 의성 변호사[사진]는 “해외 사례를 살펴보면 의료인 판단 하에 의료기기 재사용이 허용되는 국가가 있다”며 “재사용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던 2016년 2월 당시엔 다른 나라 사례에 비춰 관행적으로 재사용이 이뤄졌다는 점을 들었다”고 설명했다.
미국과 독일은 일정한 질적 관리 하에 재사용을 허용하는 반면, 스페인과 스위스는 원칙적으로 재사용을 금지한다. 일본과 싱가포르는 의료인의 책임 하에 재사용 여부를 판단하게 한다.
국내의 경우 2015년까진 일본과 싱가폴과 같은 ‘방임형’이었다가 최근에서야 구체적인 법이 제정됐다. 2016년 5월 일회용 의료기기 재사용 금지에 대한 법률이 제정됐다.
이어 올해 3월 개정된 의료법은 의료인이 보건복지부가 정하는 일회용 의료기기를 재사용할 수 없도록 세부적인 내용을 규정했다. 다만 재사용이 금지되는 일회용 의료기기 범위는 아직 복지부령으로 정해지지 않았다.
김 변호사는 이어 “또 다른 쟁점은 일회용 의료기기 겉포장에 표기된 ‘재사용 금지’란 문구였다. 하지만 이 문구는 의료기기를 유통, 취급하는 기기사들에 대한 안전책으로 의료인의 판단까지 규정하는 표기는 아니라고 설득했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A씨 변호인 측의 이 같은 주장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2015년 의료법 개정 전까지는 이 사건 천자침과 같은 금속성 일회용 의료기기를 적절히 재처리해 재사용하는 경향이 있다“며 ”특히 이사건 천자침은 재사용으로 인해 기능상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낮고, 오토클레이브 등을 통한 멸균 소독이 이뤄진다면 감염 위험이 높아진다고도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어 "이번 사건 행위가 사회통념상 의료인(의사)로서 도덕성이나 직업윤리에 위배되는 행위라고 볼 수 없다"며 복지부 처분이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김 변호사는 “생명을 다루는 의사에겐 엄격한 수준의 도덕적 잣대가 요구되는데, 이번 사건 처분은 의료인에게 높은 윤리의식을 요구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하지만 천자침의 경우 플라스틱 주사기와 같은 기기와는 달리 재사용시 위험성이 명백한 기기가 아니었다”며 “또한 법이 재정되기 이전 행위로 참작의 여지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김 변호사는 “오는 9월 일회용 의료기기 재사용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을 정하는 법이 시행되는데, 의료인들은 관련 규칙등을 잘 살펴 법적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