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디 양보혜 기자] "아직 혼자 수술을 집도할 수 없는 레지던트가 당장 수술이 필요한 응급환자를 맡게 된다면, 수술을 하는 게 과연 옳을까". 의료현장에서 의사가 종종 딜레마에 빠지는 순간이다.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리는데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다. 문제는 비슷한 상황을 자주 맞닥뜨리게 된다는 점이다. 이럴 경우 의학적 판단을 넘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요소 등에 대한 고려를 요구받는다. 이때 인문학은 병원 밖 세상과 소통하고, 타인에 대한 이해를 돕는 유용한 '외시경'이 될 수 있다. 내시경 세상 속에서 고개를 들어 환자와 소통해야 한다는 오흥권 분당서울대병원 교수를 만나 '의과대학 인문학 교실' 출간 계기와 함께 여러 이슈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Q. 책을 쓴 계기는
서울대 의과대학에서 '영화와 문학으로 보는 내러티브 의학'이라는 이름의 강좌를 개설해서 수업을 했다. 이 수업은 의사나 환자가 나오는 영화를 보고,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에세이를 쓴다. 그렇게 3년간 진행된 수업 내용을 책으로 엮었다. 처음 강의를 시작할 때부터 책을 써보는 게 어떨까 구상했고, 행동에 옮겨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Q. 제자와 함께 작업했다고 들었는데
제가 책을 낼 생각인 걸 알게 된 제자가 함께 하고 싶다며 적극적으로 의향을 표했다. 권시진 씨의 경우 서울대 의대에 입학하기 전(前) 경영학을 전공했다. 그가 가진 문과적 감성이 더해져 작업이 원만하게 진행됐다.
Q. '내러티브 의학'이란 무엇인가
제가 대학을 다닐 때 '내러티브 의학'이란 강의가 없었다. 그런데 미국 컬럼비아 의과대학에선 '내러티브 의학'과 관련된 코스가 있다. 이를 테면 '백혈병'이란 키워드를 던져줬을 때 의학적 관점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관련된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서 병(病)이 아닌 '사람'의 이야기로 다가가 보는 것이다. 우리도 이런 방식의 수업을 시도해보는 게 좋겠다고 여겨 교수님들과 논의 끝에 강의가 시작됐다.
"환자 아닌 인간에 대한 이해, 내러티브 의학 통해 학생들이 환자들과의 관계 형성 및 유지 경험 제고 희망"
"100% 학생 중심으로 진행돼서 인지 수강 학생들 만족도 높아"
"환자 아픔을 공감하고,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때 효과적인 치료 가능"
"시험 보고 나면 또 시험, 살인적 분량 공부하는 의대생들에게 사회적 감수성 어렵다"
Q. 임상실습 전 의대생들에게 특히 이 책을 권하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본과 3학년 때부터 학생들이 실습을 나간다. 환자를 보면서 언제부터 아팠는지, 어떻게 아픈지 등을 물어보는 히스토리 테이킹(history taking)을 하는데, 이 과정을 무척 어럽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학생들이 배워본 적이 없어서다. 기계적으로만 접근하면 일단 말이 안 통한다. 똑같이 배가 아파도 전라도 사람인지, 경상도 사람인지에 따라 말이 다르고 표현 방식도 차이가 난다. 책상에서 공부만 하던 의대생들이 갑자기 보통사람과 교감하고 대화를 나누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시뮬레이션을 하듯 영화를 통해 어떻게 의사가 환자를 대하는지, 환자의 마음을 느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러티브 의학을 통해 의사와 환자가 어떻게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해 나가 궁극적으로 질병을 잘 치료할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Q. '내러티브 의학' 수업이 인기가 좋은 것 같다. 지난해 서울의대 교육상도 수상했는데
교양 과목이고 선택한 학생들만 수업을 들으니 만족도가 높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수업은 보통 4시간 정도 진행되는데, 자신이 본 영화에 대해 발제 내용을 기본으로 토론하고 글을 쓰는 데 흥미를 느끼는 것 같다. 이 수업은 100% 학생 중심으로 이뤄진다.
Q. 19편의 작품 중 추천하거나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아무래도 코로나19와 관련된 '컨테이젼'을 추천한다. 이 영화는 마치 코로나19 팬데믹 발생을 예측이나 한 것처럼 잘 만들어졌다고 본다. 감염병 발생과 의사 역할 등을 간접 체험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추천한다. 또 하나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다. 이 영화를 통해 환자가 단순히 질병을 치료해야 하는 대상이 아닌 하나의 온전한 인간으로 이해햘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Q. '의사가 환자를 대상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봐야 한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는데, 많은 환자를 진료해야 하는 한국 의료현실에서 의사가 감정 노동까지 하긴 어렵다는 의견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그런 의견은 고전적인 관점이다. 근대 의학의 아이콘과 같은 윌리엄 오슬러는 말년에 옥스퍼드 의대에서 '의사의 평정심(Aequanimitas)'이란 강의를 했다. 강의에서 환자를 걱정하고 고통에 공감하되 올바른 의학적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침착함과 객관성을 유지해야 하고, 그러려면 환자 고통으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이론이 맞는 말이긴 하지만, 지금 의사들이 도그마처럼 믿고 따르는 것은 문제다. 막상 본인이 환자나 보호자가 돼 보면, 현실에 맞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시대가 변화하고 다양한 삶을 살아온 환자들이 질병이 생겨 병원을 찾는다. 환자의 아픔을 공감하고,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때 효과적인 치료를 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의대생이나 일반인들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간접 경험을 가졌으면 한다.
Q. 최근 의대생들이 사회적 이슈의 한 축으로 등장했다. 의사 증원, 공공의대 설립 등을 반대하는 과정에서 엘리트주의 혹은 사회적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일부 있었다. 이에 대한 견해는
의대생이 사회 일반과 왜 거리가 있느냐는 질문으로 해석되는데, 그 원인 중 하나는 살인적인 의과대학 공부량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의대생들은 과거 선배들이 공부한 내용에다가 그들이 연구한 내용까지 배우다보니 학업 분량이 어마어마하다. 방학이 1년에 1~2주밖에 안 된다. 시험을 치고 뒤돌아서면 또 다시 시험 치를 준비를 해야 하는 이들에게 책을 읽고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라고 요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다른 것에 눈을 돌리고 새로운 경험할 기회가 사실상 없는 것이다.
Q. 앞으로 계획은
다음 번에는 환자를 본 임상적 경험을 좀 더 담은 책을 써보고 싶다. 한국적 의료현실이 담긴 재료로 의사들이 겪는 가치 갈등을 다각도로 이해해보고 이를 정리한 글을 쓸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