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디 박대진 기자
] 제주공항에서 에머랄드빛 바다를 옆에 끼고 서쪽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한림
’이란 지역에 다다른다
. 천혜의 자연환경과 풍부한 먹거리로 연중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이 곳에 국내 의료 패러다임의 상징적 변곡점으로 평가받는 병원이 있다
. 평촌의료재단 대림요양병원
. 제주 서남지역 유일한 병원급 의료기관이라는 존재감이 확연하지만 무엇보다 이 병원의 태생 배경과 성장 과정은 국내 의료계에 적잖은 시사점을 던진다
. 대림요양병원은 얼마 전 인근 급성기병원을 인수했다
. 이는 단순한 병원계의 세
(勢) 확장을 넘어 급격한 고령화시대 의료 패러다임 변화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 대림요양병원 정연태 이사장은
‘의료 흐름
’이라는 말로 작금의 상황을 진단했다
.
위기 급성기병원, 기회 만성기병원
지금의 대림요양병원이 자리한 곳은 한 때 제주 서남부 지역 유일한 병원급 의료기관이던 한림병원이 운영되던 장소다.
2004년 개원한 한림병원은 지하 1층 지상 4층, 100병상 규모로 내과·신경과·정형외과·응급의학과 등 여러 전문과목 의료진이 지역민의 건강을 살폈다.
컴퓨터단층촬영장비, 내시경, 초음파기 등 각종 진단검사장비를 갖추고 제주시 한림읍을 중심으로 한 서부지역 5개 읍면 약 8만 여명의 주민들의 건강지킴이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야간이나 휴일에도 24시간 응급진료를 하는 등 타지역 대비 의료 인프라가 부족한 제주에서 종합병원에 버금가는 의료서비스를 제공했다.
하지만 경영상황은 날로 악화됐고, 폐원과 재개원을 거듭한 끝에 결국 2008년 최종적으로 문을 닫아야 했다.
그 무렵 대림요양병원은 한림병원이 추가 병상 확보를 위해 설립 중이던 건물에서 시작했다. 골조공사 중에 중단된 건물이었다.
이후 106병상의 요양병원을 내실있게 운영하며 자리를 잡았고, 최근 한림병원 본관 건물까지 인수해 리모델링을 모두 마치고 새로운 도약을 위한 힘찬 시동을 걸었다.
사실 평촌의료재단 역시 급성기 의료기관으로 출발해 적잖은 시련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정연태 이사장은 여러 천착 끝에 요양병원으로의 방향 전환을 시도해 결실을 맺었다.
병원급 의료기관 폐업률이 자영업 평균 폐업률 보다 높아지는 급격한 의료환경 변화 속에서는 생존이 힘들 수 있다는 절박함의 결단이었다.
그는 제주도의 인구구조 변화에도 주목했다. 제주도의 65세 이상 인구 비중은 2009년 11.9%에서 2019년 15%로 증가해 고령사회로 진입했다.
정연태 이사장은 “의료전달체계의 모호한 위치에 놓인 병원급 의료기관은 생존을 위협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급성기병원의 위기는 이미 시작됐다”고 말했다.
이어 “요양병원 개원 당시만 하더라도 급성기병원 인수는 상상도 못했지만 수 년 새에 상황이 변했다”며 “작금의 대한민국 병원환경 흐름의 단면이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오롯이 환자를 위한 리모델링
리모델링은 신축 대비 곱절의 비용과 시간, 노력이 들어간다. 그럼에도 정연태 이사장은 급성기병원 건물에서의 만성기병원의 비상을 그리며 리모델링을 결정했다.
기존 병원 대비 훨씬 넓은 건물이지만 병상수는 늘리지 않았다. 신축 병원에 적용되는 병상 이격거리 준수는 물론 환자들에게 보다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정연태 이사장이 이번 리모델링에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환기와 채광이다. 코로나19라는 신종 감염병 사태 한 복판에서 이뤄진 공사였던 만큼 자연스레 공조시스템에 심혈을 기울였다.
각 병실 천정에 최첨단 공조시스템을 구축함과 동시에 창문 크기를 늘려 환자들이 원하면 언제든 신선한 바깥 공기를 마실 수 있도록 배려했다.
채광 역시 주목할만 하다. 장기입원이 많은 요양병원 특성상 환자들이 보다 쾌적하고 밝은 병실에서 생활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수 백개의 창문을 새로 만들었다.
각층 가장 끝에 위치한 3인실의 경우 좌측은 한림의 바다가, 우측은 웅장한 한라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오션뷰와 마운틴뷰를 모두 품은 초특급 병실이다.
전남 장성 요양병원, 경남 밀양 세종병원 등 앞서 발생했던 대형화재의 교훈은 환자안전에도 각별한 관심을 쏟게 했다.
정연태 이사장은 긴박한 화재 상황에서 환자들이 신속하게 대피할 수 있도록 승강식피난기를 설치했고, 화재 대응 매뉴얼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모의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이 외에도 각 층과 병동마다 색상을 달리해 노인환자들의 공간 인식에 어려움이 없도록 했고, 안내 표지판 및 병동 글씨도 시원시원한 크기로 게재했다.
정연태 이사장은 “리모델링의 지향점은 철저히 환자에 향해 있었다”며 “병원 존재의 이유는 환자에 있기에 환자를 위한 병원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보다 쾌적하고 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최상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한다”며 “제2의 개원이라는 각오로 성심을 다해 준비했다”고 덧붙였다.
제주에 이식 중인 ‘존엄케어’
시대의 흐름에 편승해 양적성장을 이뤘지만 질적성장에 대한 고민은 떨칠 수 없었다.
하드웨어는 비용과 의지만으로도 갖출 수 있지만 실제 병원을 움직이는 소프트웨어는 최상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함을 누누이 체감해 왔기에 절실함이 더했다.
좀처럼 풀리지 않던 고민의 해답은 국내 노인의료의 선구자인 한국만성기의료협회 김덕진 회장과의 만남에서 찾을 수 있었다.
우연찮은 기회에 지인 소개로 만난 김덕진 회장의 ‘존엄케어’에 대한 열정은 그를 전율케 했고, 비로소 대림요양병원의 마지막 퍼즐을 완성케 했다.
하지만 ‘존엄케어’는 결코 만만하게 접근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동안의 시스템을 개혁에 가까운 수준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험난한 길이었다.
마냥 열심히, 마냥 친절하게 환자를 대하는 게 전부인 줄 알았던 의료진의 인식을 바꾸는 작업이 가장 큰 난제였다. ‘존엄케어’는 기존의 자세에 몇 곱절의 노력을 요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힘겨워질 때면 늘 경남 창원 희연병원을 찾았다. 국내 ‘존엄케어’의 성지와도 같은 그 곳에서 매번 마음을 다잡고 다시 제주로 돌아왔다.
그 때마다 김덕진 회장은 “급하게 가려하기 보다 제대로 가는 게 중요하다”며 다독였다.
정연태 이사장은 “길을 찾은 만큼 조금 늦더라도 차근차근 걸어가기로 했다”며 “제주도 어르신들에게도 완성도 높은 존엄케어를 제공할 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제주도 작은 요양병원의 질적, 양적성장이 국내 병원계에 의미 있는 울림이 되길 바란다”며 “앞으로 새병원에서 존엄케어를 완성해 가는 모습을 지켜봐 달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