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디 고재우 기자] 이은직 故 허갑범 교수 기념사업회 위원장(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내분비내과 교수)은 허 교수와 각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당뇨병 대가였던 고인은 사재를 털어 1만 여명에 달하는 당뇨병 환자의 DB를 만들었고, 이는 후배들의 SCI 논문 탄생 등의 밑거름이 됐다. 이 교수가 주축이 된 기념사업회는 고인(故人) 전기 발간은 물론 의학교육자상을 기획하는 등 허 교수를 기리기 위한 활동을 꾸준히 펼쳐나갈 예정이다. 본지가 발간 중인 월간 당뇨뉴스 시작을 알렸던 고인과의 인연을 알리기 위해 이은직 교수가 흔쾌히 인터뷰에 나섰다. [편집자주]
Q. 최근 故 허갑범 교수의 유고 책자를 발간했다. 고인 관련 소개할 만한 일화나 개인적인 인연이 있나.
A. 허갑법 교수 장례식장에서 조사(弔辭)를 했다. 과거 전공의 2년차 때 회진을 돌던 중 허 교수는 개업을 하려는 내게 ‘그럴 사람이 아니네’라는 말을 시작으로 두 시간여 대화를 진행했다. 이는 결정적으로 내 마음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내 학위 주제는 ‘우리나라 당뇨병 환자는 서구와 다르다. 왜 그럴까’였다. 1980년대 초 우리나라 당뇨병 환자는 현재와 달리 한국전쟁 당시 영양 결핍 등을 겪어 발병한 당뇨병이었다. 허 교수는 기존 교과서에서 기술하고 있는 당뇨병 분류와 다름을 발견했고 이를 증명코자 했다. 허 교수는 동물실도 변변치 않았던 시절에 연구비를 줬고, 100마리가 들어가는 쥐 아파트를 설계 후 동물실험을 했다. 이 연구 결과와 임상 환자 연구 결과를 통해 비특이적 당뇨병 진료지침을 확립한 것이다. 지금 연구중심병원 화두인 ‘의료 현장의 미충족 수요(clinical unmet needs)’를 키워 준 셈이다.
전공의 수료 후에는 수색 지역 군의관으로 배정됐는데 허 교수는 매우 기뻐하면서 “가까운 거리니 토요일 리서치 미팅에 참석하라”고 말했다. 틈틈이 대학 내 전자현미경실에 내원해 뇌하수체 종양 조직을 분석한 시간들은 현재 세브란스병원 뇌하수체 종양센터가 관련 연구로 전 세계를 선도하는 초석이 됐다. 당시 허 교수는 전공의 수료 후 군의관으로 복무하는 동안 연구 단절이 이뤄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병역특례와 더불어 임상과학자 등을 도입해야 함을 말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의료만 있을 뿐 의학은 없다. 의학강국이 되려면 임상의사뿐만 아니라 기초의과학자 양성에도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연세대 의과대학 교수를 시작했던 2006년 무렵 그는 “1만 여 명의 당뇨병에 대한 임상자료가 있으니, 이 교수가 주관해 우리나라 당뇨병 특성을 규명하자”고 했다. 허 교수는 사재를 털어 당뇨병 환자 데이터세트를 만들었는데, 본인이 평생 관리했던 당뇨병 환자 DB는 대학병원에서도 만들지 못한 대규모 임상자료였다. 그 자료는 수 십 편의 SCI급 논문을 탄생시키는 밑거름이었다. 마지막으로 20년 전(前) 은사님으로부터 받은 편지 내용의 일부를 전하고 싶다.
이은직 선생에게
“21세기는 지식기반 사회로 발전하면서 정보통신과학과 더불어 생명과학이 모든 과학과 산업을 주도할 것으로 생각되며 생명과학에서는 신약개발, 세포, 장기 이식과 더불어 유전자 치료가 가장 유망하고 부가가치가 높은 분야가 될 것으로 모든 사람들이 예측하고 있소. 한국에서도 교육부 주관으로 Brain korea 21 project를 만들어 21세기 과학, 기술 발전에 대비한 우수한 인재를 육성 배출한다고 하오. 그렇게 되면 한국 대학도 교육(진료) 중심의 대학과 연구중심대학으로 나누어 질것으로 생각하오.“
1999년 8월 3일 허갑범
Q. ‘인슐린 저항성과 한국인 당뇨병의 맞춤치료’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는데 책 소개 부탁
A. 당뇨병 명의로 김대중 대통령 주치의를 지냈던 허 교수 1주기(1월 23일)를 맞아 제자들이 유고를 정리한 것이다. 책 제목은 ‘인슐린 저항성과 한국인 당뇨병의 맞춤치료’인데, 허 교수가 생전에 일선 당뇨병 진료 의사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내용 등을 중심으로 집필한 한국인 특성에 맞는 당뇨병 치료를 제자들이 책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 책에는 허 교수가 주장했던 일선 ‘당뇨병은 발병 기전이 매우 다양하고, 여러 가지 질병과 관계가 있으므로 환자를 단순히 혈당이 높은 상태로 보고 치료해서는 안 되고 전인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과 함께 인슐린 저항성에 대한 대처 방법 등이 사례별로 나와 있다.
Q. 지난해 11월에는 강진경 교수 기념사업회 위원장으로서 ‘작은 거인 강진경’을 출간하기도 했다. 앞선 선배들의 업적을 기리는 일에 적극적인 거 같다. 강 교수에 이어 허 교수까지, 위원회 역할과 향후 계획은
A. 두 사람은 연세대 의대 내과학교실 출신이다. 국가에 봉사하고, 국민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신 분들을 기리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궁극적으로는 이를 기념하는 과정을 통해 후배 제자들이 보고 배우고, 더 나아가서는 큰 인물로 나아가길 기대하면서 추진하는 사업이다. 향후 허 교수 기념사업 중 계획하고 있는 일은 전기 발간, 대한내분비학회에 의학교육자상을 만들어 의학교육에 헌신한 인사를 선정해 포상하는 것이다. 허 교수는 생전 의학교육에 깊은 뜻을 두고 일을 추진했고, 의과학자를 키우는데 제도를 만드는 노력과 우수한 인재들이 의과학자로 커감에 인도와 지도를 아끼지 않았다.
"기초연구에 관심 많았고 지원 아끼지 않았던 스승"
"'인슐린 저항성과 한국인 당뇨병의 맞춤치료' 책자, 일선 당뇨병 의사들에 도움되길 기대"
"앞으로 허 교수팀 전기 발간 및 내분비학회 의학교육자상 제정해서 포상 계획"
"고인은 당뇨병 관리를 만성질환 분야 중 매우 중요하게 인식, 홍보 계몽코자 노력"
Q. 당뇨병 인구 1000만 시대다. 생전 허 교수는 정부가 추진 중인 만성질환관리 시범사업을 어떻게 바라봤나. 따로 제언한 부분이 있는지
A. 은퇴 후 허내과를 주축으로 대사증후근 포럼이라는 전문가가 모인 단체를 만들어 국민 계몽과 함께 관련 진료 의사들의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타개 1년 전에는 대사증후군 박람회를 개최해 대국민 계몽사업을 시행하려 했으나 여러 사정에 의해 추진되지 못했다. 적극적인 투자와 관심을 유도했고, 당뇨병관리를 만성질환 관리 사업 중 하나로 매우 중요하게 인식하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Q. 허 교수는 당뇨병·대사증후군 등 대가로서 환자들의 관리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가 환자를 볼 때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한 부분은 무엇인가
A. 당뇨병 진료가 쉬운 것은 아니고 개별 환자 특성에 맞춰 치료하는 맞춤 진료가 중요하다. 허 교수는 근대화 과정 중 폭발적으로 증가한 우리나라의 당뇨병의 원인은 구한말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영양결핍을 겪은 세대들이 급격한 경제적 성장을 겪으며 반대급부로 나타나는 현상임을 강조했다. 실증적 자료와 임상적 연구를 통해 이를 입증했고, 한국인 당뇨병의 특징을 밝혔다.
이는 유고집 전반에 걸쳐 나타나 있다. 허 교수 지적처럼 한국인 당뇨병은 서구인과 다르다. 당뇨병 진료 40년의 경험을 통해 당뇨병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며, 치료하기가 어려운 만만치 않은 병이라는 것이다. 수많은 당뇨병 환자를 치료하면서 얻은 지식과 다양한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알게 된 한국인 당뇨병의 특성을 분석하고, 환자 개인별 특성을 고려한 관리경험(맞춤치료) 및 사례들을 모아 책자를 발간해 행림제현(杏林諸賢)들과 공유하기로 했다.
Q. 허 교수 기념사업회 위원장으로서 월간 당뇨뉴스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A. 유고집 ‘편집자의 말’을 통해 “이 책이 고 허갑범 교수님의 생전 소망대로 당뇨병을 진료하고 있는 전국의 의사선생님들과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또 220페이지의 비매품 책자를 구독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1000부 초판을 발행했으나, 향후 수 천부를 인쇄해 계속 무료로 배포되기를 희망한다. 뜨거운 성원과 관심을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