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디 박대진 기자] 서구식 의료기관이 막 도입되던
20세기 초
. 유교문화를 지키던 나라에서 여성들은 차마 외국인 남자 의사들에게 벗은 몸을 내보이지 못했다
. 몸이 아픈 것보다 수치심을 더 크게 느낀 탓에 여성들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
. 미국의 의료 선교사 로제타 홀
(Rosetta Hall) 여사는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여의사 양성을 위한
‘조선여자의학강습소
’를
1928년 설립했다
. ‘여성인권
’이라는 개념조차 희미하던 시기에 그야말로 파격적인 행보였다
. 하지만 몇 년 뒤 홀 여사가 모국으로 돌아가면서 강습소는 존폐 위기에 처했다
. 이 소식을 접한 인촌
(仁村) 김성수 선생은 강습소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던 김탁원 선생에게 우석
(友石) 김종익 선생을 소개한다
. 이후 김종익 선생은 유언을 통해 의학전문학교 설립을 위한
‘65만원
’을 내놓는다
. 지금으로 환산하면 천문학적 금액이다
. 1938년 조선여자의학강습소는 이 돈을 기반으로 김종익 선생의 유지에 따라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됐다
. 경성여의전은 광복 후 서울여자의대가 됐고
, 이어 수도의대
, 우석의대로 이름을 바꿨다가
1971년 지금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으로 발전했다
.
‘Again 65 캠페인’의 배경에는 고려대의료원의 이러한 역사가 담겼다. 이번 캠페인을 직접 제안하고 나선 김영훈 고려대 의무부총장은 “그때의 ‘65만원은 오늘날 우리나라 의료의 한 축을 담당하는 고대의료원을 만들었다”며 “의료원의 새로운 100년을 앞둔 지금, 당시 설립자들의 숭고한 뜻을 되새기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번 모금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100주년은 향후 방향성을 고민할 시점”
“치열했던 설립자들의 정신, 새로운 100년의 근간”
이번 캠페인의 목표액은 65억원이다. 3월부터 9월 15일까지 6.5개월 동안 진행된다. 다만 김영훈 의무부총장은 모금 규모보다는 캠페인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얼마나 많은 돈이 모이느냐가 아닌, 얼마나 많은 구성원이 참여하느냐가 중요하다”며 “이번 캠페인은 그동안 잊었던, 혹은 미처 몰랐던 의료원 역사와 기부정신을 일깨우는 마중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로제타 홀 여사는 당시 ‘가장 어렵고, 험난한 곳’을 일부러 찾아 조선에 왔고, 열악한 환경에서 본인의 피부를 직접 환자에게 이식하는 인술을 실천했다.
김영훈 의무부총장은 “우리 의료원, 의과대학 구성원들에겐 이러한 홀 여사의 정신이 배어 있다”며 “설립자들의 신념은 의료원이 새로운 100년으로 나아가는데 강한 동력이 될 것”이라고 설파했다.
“한국 산업화와 동행, 자긍심의 원천”
“수 많은 ‘최초’ 타이틀, 의학발전 이끈 흔적”
설립자들의 노력과 희생으로부터 탄생한 고려대의료원은 한국 사회와 함께 성장했다. 해방 이후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거듭나기까지 치열했던 산업화 시대, 산업역군의 곁을 지켰다.
고대안산병원과 고대구로병원이 공단 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역사의 흔적이다.
김영훈 의무부총장은 “고대의료원은 한국의 성장통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며 “의료 인프라가 미비하던 시절 가장 힘들고 낮은 곳에 있던 사람들을 보듬었다”라고 말했다.
유행성 출혈열, 일명 ‘한탄 바이러스’를 발견한 것은 그가 꼽는 고려대의료원의 주요 업적이다.
쥐를 매개로 전염되는 이 병은 당시 노숙이 일상화됐던 우리나라 곳곳에 창궐했다. 특히 6·25 전쟁 중에는 한탄강 유역에서 출현해 수 많은 장병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
치명적인 질병이었던 한탄 바이러스를 처음 발견하고, 백신을 개발한 곳은 고려대의료원이었다.
그는 “고대의료원은 지금까지 감염병 사태에 선도적으로 대처했다”며 “앞으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 다음 팬데믹 시기에서도 가장 앞에서 국민건강을 수호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세계 최초로 ‘열 손가락 절단 재접합술’에 성공한 곳 역시 고대의료원이었다. 병원을 찾아간 환자들은 구로공단에서 일하다 사고를 당한 노동자였다.
구로병원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직경 0.3mm 내외의 혈관문 합술을 요하는 수지첨부접합술에도 성공해 불의의 사고를 당한 많은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줬다.
이 밖에도 국내 최초 인공수정, 국내 최초 재활의학교실 개설, 국내 최초 전극도자절제술 도입 등 각 의학 분야에서 의료원이 가진 ‘최초’ 타이틀이 수두룩하다.
김 의무부총장은 “국내 의료 발전을 이끌며 국민들의 고민과 시름을 덜어준 고대의료원의 발자취이자 훈장”이라고 자부했다.
“모금액은 메디사이언스파크에 투입”
“의료 R&D 산실로 넥스트 노멀(next-normal) 주도”
김 의무부총장은 “앞으로 고려대의료원이 일궈낼 새 역사도 과거에 못지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올해 9월 문을 여는 정릉 메디사이언스파크는 그 같은 여정에서 힘찬 첫걸음이 될 전망이다. 이번 ‘Again 65 캠페인’의 모금액은 메디사이언스파크에 투입된다.
김 의무부총장은 모금액의 구체적인 사용처를 소개하며 크게 연구·교육·기반 세 분야를 나눴다.
우선 연구와 관련해선 팬데믹 사태 대응을 위한 백신과 치료제 개발을 지원할 예정이다. 중장기적으로는 신약 개발을 위한 ‘전 주기 지원 시스템’을 구축한다.
최근 범의학계가 뛰어들고 있는 인공지능(AI)·빅데이터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연구개발도 이뤄진다.
교육과 관련해선 국제 경쟁력을 갖춘 감염역학 전문가를 양성할 계획이다. 감염병 사태 중 불거진 전문인력 부족에 대처하고 차세대 바이오 인재를 육성하는 데도 힘을 보탤 방침이다.
각 분야 발전을 위해 바탕이 되는 의료 연구개발(R&D) 기반도 메디사이언스파크에 형성된다.
차세대 백신 플랫폼을 만들고 감염병 위기 대응 인프라 구축을 모색한다. 중장기적으로는 K-바이오를 이끌 참신한 스타트업의 요람을 지향한다.
김 의무부총장은 “최우선의 과제가 감염병 연구가 될 것”이라며 “바이러스가 우글거리는 실험을 해도 안전한 환경에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실험실을 만들고자 한다”고 말했다.
장기적으로는 신약 개발과 인재양성에 대한 투자에 주력한다는 계획이다.
그는 “국내 의료가 계속 발전하기 위해서는 결국 훌륭한 후학을 키워내는 게 중요하며, 신약은 국민들의 의료 안전지대를 넓혀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모교 고려대 의대, 애착과 자부심”
“국민 성원에 선진의료로 보답”
캠페인 추진 배경에서도 엿볼 수 있듯 김 의무부총장이 모교에 가진 애착은 남다르다. 여기에는 그의 집안 내력이 맞닿아 있다.
그의 어머니는 과거 고려대 의대 전신인 서울여자 의과대학에 입학했었다. 1950년대 전란 속에서 불가피하게 학교를 떠났지만 이후 어머니의 못다한 학업은 김 의무부총장이 이어갔다.
김영훈 의무부총장은 “고려대 의대 진학은 어머니의 권유가 결정적이었다”며 “이후 입학한 모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들을 주었다”고 술회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병원이 운영되던 시절, 그는 의국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심전도 촬영을 경험했다. 전기 심장 제세동기와 심장 모니터링 기기도 처음 사용해 봤다.
그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열정을 가진 스승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제자들은 가장 선구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며 “그분들의 가르침은 지금도 유산처럼 남아있다. 고대의료원 구성원들은 이러한 역사에 특히나 자부심이 강하다”고 힘줘 말했다.
실제 많은 교우들이 기부활동으로 모교 발전에 기여한 사례를 소개했다.
대표적으로 해연의학도서관은 많은 기부와 김해란 교우의 고액기부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김 의무부총장 재임기간 동안 모인 기부금액만 200억원을 넘어섰다.
이번 모금 캠페인도 본격적인 홍보가 시작되지 않았음에도 KU-Medicine 발전위원회 문규영 공동발전위원장의 고액기부를 시작으로 김숙희, 남명화 교우 등 동참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김 의무부총장은 “고려대 가족 외에도 많은 국민들께서 보내주시는 성원에 고려대의료원은 선진의료로 반드시 보답하겠다”고 약속했다.
의료원 구성원들에게는 ‘시대적 필요성’에 부응할 것을 당부했다.
그는 “예상치 못한 대규모 감염병 사태, 미세먼지와 같은 환경오염이 촉발하는 각종 질환 등 생활상이 변화함에 따라 의료기관에 대한 사회의 요구도 계속해서 변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의료의 역할이 확대되면서 의료원의 어깨에 걸린 책임감도 막중해지고 있지만 기본을 잊지 않는다면 충분히 잘 해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설립자들의 정신, 의료발전을 위해 분투했던 스승들의 의지, 훌륭한 후학을 양성을 위해 교우들이 보낸 애정이 의료원을 지탱하는 기둥이 됐습니다. 앞으로도 국민들에게 신뢰받는 의료인으로서, 우리나라 의료를 이끌어 나가는 구심점이 되도록 사력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