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디 박정연 기자] ‘한의계 숙원’으로 불린 첩약 건강보험 급여화 시범사업이 시행 1년 만에 흔들리고 있다.
시범기관 9000여 개소 중 10%에도 못미치는 700여 개소에서만 처방이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의사들은 불필요한 원산지 표기 규정과 비현실적인 수가, 그리고 합리적으로 못한 행정절차 때문에 현실적으로 참여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2일 한의계에 따르면 대한한의사협회(한의협)는 최근 한의사 회원들을 대상으로 ‘첩약 건강보험 시범사업 경과에 따른 공청회’를 개최했다.
앞서 한의협은 이번 공청회에서 찬성 측과 반대 측 입장을 표명할 회원을 각각 지원받아 양쪽 입장을 청취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공청회가 임박해도 찬성 측 지원자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당초 계획과 달리 공청회는 토론이 아닌 설명회 형식으로 진행됐다.
찬성 입장을 대변하는 회원이 없을 정도로 한의계 내부 여론은 부정적인 상황이다.
실제 시범사업에 따라 환자에게 처방을 하고 있는 한의의료기관도 크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이날 공청회에서 사업현황을 보고한 이승언 한의협 보험‧국제이사는 데일리메디와의 통화에서 “한의협이 자체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7월 기준 시범사업에 실질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한의의료기관은 700곳 정도로 파악된다”며 “의료현장 여건을 반영하지 못한 시범사업에 많은 한의사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의협 “원산지 표기‧수가기준‧행정절차, 의료현장 현실 반영 안돼”
한의계는 이번 시범사업의 문제점을 크게 세 가지로 꼽는다.
첫째는 원산지 표기 규정이다. 시범사업에 따라 처방을 하는 한의사들은 한약재의 원산지를 의무적으로 표기해야 하는데, 똑같이 안전한 약재임에도 원산지에 따라 환자들은 불필요한 편견을 갖게 된다는 지적이다.
이 이사는 “기존에도 한의사들은 식품의약품안전처 의약품 제조 및 품질관리기준(GMP)에 따라 한약재를 처방해야 한다. 수입산, 국산 관계없이 이미 정부가 안전성을 담보하는 약재”라며 “하지만 대부분 환자들은 GMP제도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원산지 표기에 따른 걱정과 불만은 온전히 한의사들이 떠안는 상황”고 설명했다.
둘째는 수가 기준이다. 한의사들은 현재 한약재를 보관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자연소실분(감모율)이 반영되지 않은 점을 가장 큰 문제로 보고 있다. 감모율이 반영되지 않으면서 이에 대한 손실은 온전히 한의사들이 떠안게 됐다는 것.
또 현재 시범사업에서 책정된 최대수가인 ‘15만880원(10일분 20첩 기준)’은 현실적으로 청구하기 어려운 값이라는 이야기다.
이 이사는 “시범사업 수가는 진찰비 포함 10만8760원에서 15만880원으로 정해져 있는데, 최대치를 청구하기 위해선 거의 쓰이지 않는 처방에서나 가능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앞서 시범사업을 추진했던 전임 집행부는 수가에 대해 ‘최저 15만원’을 제시하며 최종안을 조율했었다.
이 밖에 기본진찰료에 해당하는 ‘심층변증방제기술료’도 지나치게 낮은 수준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셋째는 행정절차에 대한 불만이다. 시범사업에 따라 처방받은 환자의 경우 진료 후 바로 수납을 해야 하는데, 충분한 처방을 위해 고민할 시간이 전혀 주어지지 않고 있단 얘기다.
이 이사는 “환자를 종합적으로 살피는 과정에서 처방이 즉각적으로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진료 후 가장 적합한 처방을 별도로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시범사업에선 수납과 처방내역입력이 동시에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성에 차는 처방’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민원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의협은 지금까지 제기된 문제점을 검토한 뒤 시범사업에 대한 전회원 투표를 실시할 예정이다. 이 이사는 "‘개선 없는 사업 지속’은 회원들의 큰 반발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해줄 보건복지부와의 논의는 지지부진한 것으로 전해졌다. 복지부 한의약정책관은 전임 이재란 정책관 6월 퇴임 이후 공석인 상태다.
한의약정책과의 첩약 급여화 시범사업 담당자도 이달 초부터 3주간 코로나19 업무에 파견된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