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디 박대진 기자] 가습기 살균제 사태는 국내 ‘독성물질’ 관리체계 부재를 여실히 드러냈다. 정부는 일상의 독성물질이 국민건강에 치명적 위해를 가할 수 있음을 뒤늦게 인지했다. 이후 독성물질과 관련된 정부 산하 기구나 단체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말 그대로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었다. 물론 제대로 된 처방이 이뤄졌으면 다행이겠지만 이번 역시 정부는 부처 간 엇박자 행정을 되풀이 했다. 번듯한 컨트롤타워도 없이 각 부처별로 경쟁하듯 기구들을 신설했다. 농촌진흥청은 ‘농약’,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의약품’, 환경부는 ‘화학물질’ 등 부처별 관리 영역에 국한된 기구나 시스템이 대부분이었다. 더욱이 각 시스템에 구축된 독성물질 정보들은 호환도 되지 않아 실효성을 담보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울시가 결단을 내렸다. 각 부처에 분산된 독성물질 정보를 일원화해 일반인과 의료진에게 제공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었다. 이름하여 ‘서울시 독성물질 중독관리센터’다.
서울특별시는 가습기 살균제, 라돈 등 독성물질 중독사고에 대한 적극적이고 신속한 대응을 기치로 지난해 독성물질 중독관리센터를 출범시켰다.
운영은 공모를 통해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 맡겼다. 평소 응급의료 현장에서 독성물질 중독사고 환자의 목숨을 수도 없이 살려낸 응급의학과 이성우 교수의 결연한 의지가 빛을 발했다.
서울시 독성물질 중독관리센터 이성우 센터장은 “늦게나마 각 부처에 분산된 독성정보 일원화를 통해 일반인 상담과 진료현장 정보제공을 할 수 있게 된 점은 고무적”이라고 평했다.
실제 일각이 여삼추인 긴박한 진료현장에서 의료진은 중독사고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해당 독성물질 정보를 찾는데 적잖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야 한다.
그만큼 치료시점은 늦춰질 수 밖에 없다. 평소 누구보다 그 절박함을 체감해 온 이성우 교수는 중독관리센터 공모 소식을 접하고 한치의 망설임 없이 신청서를 접수했다.
대한임상독성학회 이사장으로도 활동 중인 그는 중독관리센터가 향후 국내 독성물질 관리체계 구축에 결정적 변곡점일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상담정보 기반 중독사고 감시체계 구축 추진"
일단 중독관리센터는 일반인과 의료인, 119 상황실 등에 독성물질 관련 중독질환 상담을 제공하고, 궁극적으로는 상담정보 기반의 중독사고 감시체계를 구축할 예정이다.
가야할 길을 멀고 해야할 일은 많지만 주어진 시간은 3년 밖에 되지 않는다. 이성우 센터장은 독성물질 DB 구축 작업과 동시에 중독상담 콜센터부터 개설했다.
일반인들에게는 일상생활 속 독성물질 노출 관련 상담을 제공하고, 의료진에게는 중독사고 환자 치료를 위한 독성물질 정보 제공을 돕는다.
중독사고는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만큼 365일 24시간 콜센터를 운영하는 게 이상적이지만 한정된 예산과 인력을 감안해 우선 월~금 오전 9시~오후 5시까지만 운영한다.
콜센터(02-1855-2221)에 연락하면 즉각적인 전문상담과 응급의료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다. 중독관리센터 홈페이지에서도 정보 확인이 가능하다.
이성우 센터장은 “화학물질, 의약품, 농약, 천연독 등의 데이터가 각 부처에 분산돼 있다”며 “급성 중독질환에 신속한 대처를 위해 일원화된 데이터뱅크 구축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상담콜센터를 운영하면서 축적된 사례들을 중심으로 각 독성물질 중독사고 증상과 인과관계 등 중독감시 지표를 도출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여기에 더해 이성우 센터장은 국내 최초의 ‘중독관리센터 국제 인증’을 추진 중이다.
현재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중독관리센터 국제 인증을 시행 중이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절반 이상에서 이 인증을 받은 물질중독센터가 운영 중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중독관리센터 국제 인증이 전무한 상태다. 앞서 각 부처별로 경쟁적인 기구나 단체를 설립했지만 국제적으로 공인된 곳은 없다는 얘기다.
이에 이성우 센터장은 서울시 독성물질 중독관리센터의 국제 인증을 추진키로 했다. 목표는 2023년 말이다. 현재 인증기준 등을 충족시키기 위한 사전작업이 한창 이뤄지고 있다.
서울시 독성물질 중독관리센터가 WHO 인증을 획득할 경우 국내에서 유일한 국제적 수준의 중독관리센터가 된다.
이성우 센터장은 “세계적으로 98개 국가에서 국제 인증을 받은 중독센터가 운영 중이지만 아직까지 국내에는 국제사회에서 인정 받는 센터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첫 도전인 만큼 쉽지는 않겠지만 남은 시간 착실하게 준비해서 세계보건기구 중독관리센터 국제 인증을 성공시키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