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디 박정연 기자] 올해 초 의료계에는 오래된 이슈에 대한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비(非)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에 대한 SSRI(선택형 세로토닌 재흡수억제제) 제제 처방제한 철폐다.
지난 2월, 대한신경과학회는 오랜 침묵을 깨고 성명서를 냈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SSRI가 도마에 이른 이후 약 4개월 만이었다.
학회에 따르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은 내과, 가정의학과, 소아청소년과 등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아닌 이들에 대해 “SSRI 항우울제 처방기간 제한을 철폐한다”는 내용의 Q&A를 마련했다.
학회에 따르면 심평원은 지난해 11월 8일 SSRI 항우울제 처방 규제 관한 회의를 개최한 뒤 올해 초 급여 고시에 대한 Q&A(개선안)를 마련했다.
이 회의에는 이진수 진료심사평가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해 내과수석위원, 기준수석위원, 종양내과책임위원, 약학책임위원, 정신건강의학 대표위원, 가정의학 상근심사위원, 신경과 전문의위완, 약제기준부 팀장 등이 참석했다.
심평원이 마련한 Q&A 핵심은 비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에 대해 ‘우울 증상이 지속적으로 2주 이상 계속되는 경우 상용량으로 1회 처방 시 60일 범위 내에서 반복 처방할 수 있습니다”란 문구가 추가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내과, 소아청소년과, 신경과 등의 학회는 "이 같은 처방 제한 때문에 우울증 환자들에게 연속적인 치료가 이뤄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타 진료과에선 아예 우울증 환자를 보지 않게 됐다"고 지적해왔다.
이에 앞서 학계에선 Q&A가 결정되면서 SSRI 처방제한 철폐를 둘러싼 오랜 논란이 종식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학회에 따르면 심평원이 Q&A를 결정한 이후에도 처방제한 철폐 사안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학회는 성명서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20년 만에 관련 전문가들 회의를 통해 SSRI 항우울제 처방 규제에 대한 개선안을 도출했다. 그런데 시행이 3달이나 지연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단순 계산하면 하루에 36명이 자살로 아까운 생명을 잃고 있는 것이다. 3달이면 3240명이다. 1초가 급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울증 조기 진단과 치료는 불필요한 검사 및 수술, 약 처방을 크게 줄이고, 환자들을 고통에서 빠르게 벗어나게 한다. 더욱이 1차의료의 적극적인 우울증 치료와 자살 위험의 감시가 없이는 자살률을 절대로 줄일 수 없다”고 거듭 필요성을 호소했다.
정신건강의학과 “SSRI 처방-높은 자살률 불분명”
SSRI를 둘러싼 논의를 둘러싼 시계가 빠르게 흘러가는 가운데 신경정신의학회는 여전히 강경한 입장이다. ‘철폐 촉구’ 입장에 기본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는게 이들의 이야기다.
국정감사 이후 신경정신의학회 측은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SSRI 처방일수 제한과 높은 자살률은 인과관계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들은 “SSRI만으로 우울증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며 “타 약물 선택지 및 전문의의 판단 등이 모두 배제된 비약적 논리며, 결론부터 세워둔 잘못된 해석”이라고 반박했다.
최근 몇 년 간 SSRI 처방률은 늘었지만 자살률은 감소하지 않고 오히려 증가했단 점도 이들은 지적했다. 학회 측은 “SSRI 처방제한이 자살률에 영향을 준다는 논리대로라면 이러한 통계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SSRI 처방제한이 철폐될 경우 오히려 우울증 치료 인프라가 열악해질 위험도 있다고 이들은 지적했다.
비(非) 정신건강의학과에서 단순히 SSRI 처방을 하고, 정신건강의학과로 환자를 전원하지 않게 되면 적절한 치료 기회를 놓치게 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우려다.
신경정신의학회는 또한 “우울증은 전문의 진단이 필요한 질환이다. 젊은 환자의 약제 선택도 신중히 하는데, 노인환자의 경우 복용하고 있는 양이 많아 약물 간 상호작용 등을 고려해야 해 약제 선택이 매우 중요하다. 전문의가 외에는 신중한 판단이 어렵다”고 강조했다.
고민 깊어진 복지부…“전문가 공론의 장(場) 마련하겠다”
한편, 신경과학회가 강경한 성명서를 내놓으면서 복지부도 후속조치 마련을 고심하고 있다.
조만간 전문가 자문회의를 열고 사안을 살필 계획이란 방침이다.
복지부 보험약제과 관계자는 지난 2월말 데일리메디와의 통화에서 “SSRI를 둘러싼 논란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도 제기됐다. 각 학계 합의가 필요한 사안인 만큼 전문가 자문회의를 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복지부는 앞서 각계 의견을 공식적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최연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SSRI 처방제한 철폐에 대해 권덕철 복지부 장관에게 질의했다. 당시 권 당관은 “당장 해결하기는 어려운 사안으로 대한의학회 등 유관 단체가 모두 논의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을 열고 해결책을 찾겠다”고 답변했다.
그동안 논의가 지연된 이유에 대해 복지부 관계자는 “연초 대규모 인사이동에 따라 업무가 순차적으로 인수인계 됐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 심평원 전문위원이 마련한 Q&A 합의안에 대해 복지부는 직접 검토가 필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신경과학회에 따르면 치료 약제, 수술 또는 검사의 급여 기준에 대한 Q&A는 일반적으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관련 전문가 회의에서 결정하고 개시한다.
복지부 관계자는 “심평원 행정해석인 Q&A 첨부를 통해 규정을 정해야 할지, 아니면 복지부 차원에서 고시 개정이 필요할지 등 고민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심평원도 SSRI제제 처방 제한에 대해선 복지부 주도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놨다.
전문위원들이 마련한 Q&A 합의안은 현재 관할 부서인 약제관리실 약제기준부에 건의된 상태다.
신경과학회 “항우울제 처방, OECD 평균 ⅓ 수준”
신경과학회는 복지부가 굼뜬 모습을 보이자 자료수집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홍승봉 대한신경과학회 전임 이사장은 “해외와 비교할 수 있는 통계나 각종 자료를 살펴보면 처방제한 규정을 철폐해야 하는 너무나 많은 근거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장 대표적인 논거는 자살률 해결”이라고 말하며 “OCED 국가별 항우울제 사용량을 살펴봐도 한국은 평균 3분의 1 수준에 그친다. 당뇨병약 사용량은 평균 수준이며, 항생제 사용량은 가장 높은 수준으로 집계된 것에 비하면 한국 우울증 치료 인프라가 많이 열악한지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2021년 전반기 SSRI 항우울제 처방 건수를 살펴보면, 정신건강의학과 이외 1차의료 진료과에선 사실상 전멸 수준”이라며 “1차 의료기관이 안전한 항우울제인 SSRI 처방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조속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재차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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