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그러했다. 소임에 충실하다 보니 생색은 늘 먼거리에 있었다. 이 정도 역할에 이 정도 성과면 자찬(自讚)의 욕심도 부릴만 하지만 묵묵히 다음 걸음을 걷는 중이다. 사실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감염병 사태에서 서울특별시 보라매병원의 활약은 눈부셨다. 초반부터 미증유의 감염병 대응 모델을 제시했고, 독자적이고 선제적인 시스템을 가동했다. 경증환자를 위한 ‘생활치료센터’, 감염 차단 검사시설인 ‘글러브 월’ 등이 바로 보라매병원에서 시작됐다. 특히 무려 16명의 교수진을 역학조사관으로 파견하는 등 일선 의료기관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결단을 잇따라 내리며 국가 보건위기 상황 극복에 앞장섰다. 활약 대비 낮은 인지도는 보라매병원이 걸어온 그동안 행보와 맞닿아 있다. 그저 묵묵히 의료 취약계층의 중증환자 치료를 전담하는 ‘3차 공공병원’ 역할을 수행할 뿐이었다. 그런 보라매병원이 최근 ‘코로나19 백서’를 발간했다. 결코 생색을 내고자 함이 아닌 다시금 찾아올 감염병 사태에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전체병상 전환 고사,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
코로나19 백서를 바라보는 이재협 병원장의 소회는 남다르다. 코로나19 당시 재난의료지원단장, 코로나TFT 위원장 등 야전사령관으로 감염병에 맞섰던 만큼 애착이 클 수 밖에 없다.
지난 3월 병원장에 임명되기 전부터 백서 준비가 시작됐지만 훗날 언제 재현될지 모를 감염병 사태에 대비해 충분한 길라잡이가 될 수 있도록 검수에 검수를 거듭했다.
이번 백서에는 코로나19 사태 초기부터 보라매병원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지 상세히 기술돼 있다.
2020년 1월 20일 국내 첫 코로나 확진자 발생 1주일 만에 국무총리와 보건복지부 장관, 서울시장이 찾은 곳은 서울대병원도 국립중앙의료원도 아닌 보라매병원이었다.
메르스 사태 경험을 기반으로 구축해 놓은 감염병 대응 제반 시스템은 코로나19 상황에서 빛을 발했다. 보라매병원 시스템은 전국 대부분의 의료기관에 모범답안처럼 투영됐다.
하지만 고충도 적잖았다. 공공병원으로서 솔선해야 하는 상황에 동요하는 의료진을 설득해야 했고, 시시각각 변하는 방역지침에도 순응해야 했다.
당시 보라매병원 코로나 대응 책임자였던 이재협 병원장은 여러 기억 중에서도 보건당국이 전체 병상을 코로나19 전담병상으로 전환하라는 요구를 가장 큰 여러 어려움으로 꼽았다.
확진자 폭증으로 병상대란이 현실화 되자 보건당국은 공공병원인 보라매병원의 전체 병상을 코로나19 전담병상으로 전환할 것을 수 차례 주문했다.
하지만 이재협 병원장은 끝까지 이를 고사했다. 저소득층을 비롯한 의료 취약계층의 중증환자 치료를 전담하는 3차 공공병원 역할을 지켜내야 한다는 소신의 발로였다.
그는 “만약 모든 병상을 코로나 환자 수용을 목적으로 전환한다면 결국 취약계층 중증환자는 서울 시내에서 치료받을 곳이 없어 더 큰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술회했다.
서울시로부터 위탁 운영 중인 만큼 거절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재협 병원장은 결과적으로 그 때의 결정이 잘한 일이라고 확신했다.
그렇다고 보라매병원이 코로나19 환자 치료에 소홀한 것도 아니었다. 전체 병상의 40%를 코로나19 병상으로 가동, 확진자 중에서도 중증환자만 치료하며 여러 생명을 구해냈다.
보라매병원은 에크모를 비롯해 CRRT와 기관삽관이 필요한 고위험 환자군을 서울 시내 병원 중에서도 가장 많이 받았고, 의료진의 노력으로 중환자들을 살렸다.
“병원 역할 공공성-수익성 균형 맞추는거 고민”
이처럼 코로나19 사태에서 보여 준 보라매병원의 행보는 그야말로 ‘공공의료 3차 병원’의 진가였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감염병 중증환자와 취약계층 중증환자를 동시에 치료하는 유연적인 대처로 공중보건위기 극복과 사회적 약자의 의료공백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이재협 병원장은 “코로나19 환자는 물론 일반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병상을 함께 운영한 덕에 취약계층의 치료기회 상실을 막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3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야전사령관으로 감염병 사태 극복을 진두지휘했던 그는 이제 병원 전체를 아우르는 병원장이자 경영자로 또 다른 도전에 나섰다.
물론 서울의대 의예과 학과장, 보라매병원 관절척추센터장, 공공의료본부장, 진료부원장 등 풍부한 보직 경험을 갖춘 만큼 ‘준비된 병원장’으로 기대를 받고 있지만 고민은 적잖다.
아무래도 가장 큰 걱정은 병원 공공성과 수익성의 균형 맞추기다. 보라매병원은 서울시가 설립한 공공병원으로서 취약계층 건강권 및 생명권 사수가 궁극적인 지향점이다.
유수의 대학병원들도 어렵다는 의료질평가 3회 연속 1등급을 유지할 정도로 진료 역량은 이미 3차 병원임에도 취약계층 문턱이 높아질 것을 우려해 상급종합병원 도전을 포기할 만큼 진심이다.
하지만 병원장 입장에서는 경영지표를 간과할 수 없는 구조이다 보니 ‘공공성’과 ‘수익성’이라는 두 명제 사이에서 천착을 거듭해야 하는 처지다.
이재협 병원장은 공공병원인 보라매병원이 오롯이 설립 취지에 전념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 조성 필요성을 설파했다.
소위 공공병원의 ‘착한적자’를 과감히 인정하고 수익성에 대한 고민없이 취약계층 중증환자 생명을 지켜낼 수 있는 지원이 절실하다는 제언이다.
구체적으로는 공공의료도 의료기관 역할에 따라 경증, 중등증, 중증환자를 치료하는 구조를 설정해 그에 상응하는 별도의 수가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재협 병원장은 “보라매병원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은 공공의료 상급종합병원”이라며 “일반 의료체계와 별도 수가 및 시스템을 고민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이어 “이번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공공의료에도 3차 병원 역할이 필요함을 절감했다”며 “사회적 공감대와 함께 제도권의 전향적 검토가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