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난 2월 6일 의대 정원을 2000명 증원하겠다고 발표한 지 꼬박 50여일이 흘렀다. 길고도 짧은 이 기간동안 정부와 의료계는 '2000명 증원'과 '증원 백지화'란 평행선 위를 달리며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전공의들은 병원을 떠났고, 의대생은 휴학했으며, 급기야 대학병원 교수들까지 사직서를 제출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의료공백이 커지면서 진료가 지연되고 일선 병원들은 도산의 우려까지 쏟아내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양측은 한발의 물러섬이 없다. 이 가운데 데일리메디는 전문가들의 고견을 토대로 의대 증원을 둘러싼 상반된 입장을 정리했다. 의대 증원을 지지하는 정형선 연세대 보건행정학부 교수와 반대 입장인 노환규 전(前) 대한의사협회 회장의 글을 연속 게재한다. [편집자주]
교육부는 지난 3월 20일 의과대학 입학정원을 기존 3058명에서 2000명 늘어난 5058명으로 확대하는 대학별 배정 인원을 발표했다.
2000년대 초의 의대 정원 축소 이후 20년 만의 변화다.
필자는 지난 2023년 6월 한 인터뷰에서 2024년 의대 증원을 교육부에 통보하지 않은 보건복지부 관료들을 신랄히 비판했다.
이를 통해 증원을 추진할 실력도, 자신도 없으면서 그 순간만 넘기려고 하는 공무원의 행태를 한탄했다.
보건복지부의 관료들은 부처 선배이기도 한 필자가 대놓고 하는 비판이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불과 몇 개월 후. 후배 관료들은 다른 사람이 돼 나타났다. 나오는 정책들 하나하나에서 의료제도가 가야 할 방향을 균형 있게 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의대 증원을 대안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추진 전략은 치밀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뤄냈다.
의사 편이라고 여긴 정부의 반(反) 의사 정책
필자는 지난 2010년 한 일간지에 '의대 정원 늘려야 한다'는 칼럼을 게재해 의대 증원에 대한 논의의 화두를 던졌다.
지난 14년의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그간의 세월은 당시에도 늦었다고 호소했던 의사 부족의 문제점이 점차 두드러지고, 정책 당국과 국민이 이를 인지해 가는 시간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400명 증원을 시도했다가 전공의 파업에 두 손을 들던 당시 필자는 '의사들의 사다리 걷어차기', '의대정원과 지역의사' 제하의 기고를 통해 정부의 백기 선언을 막아보려 했다.
지난해 말 증원 논의가 재개될 때는 '의대 대폭 증원은 문제 해결 필요조건'임을 강조했다.
올해 들어 윤석열 정부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강한 의지를 갖고 의사 증원을 추진하자 여러 번의 칼럼을 통해 정부 정책에 이론적 근거를 보충하며 지지했다.
사실 올해 초만 해도 2000명 증원이 이뤄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필자는 2011년 OECD의 다변량시계열자료 연구를 기반으로 600명 증원을 주장했고, 문재인 정부 당시 400명 증원을 시도했다가 실패하는 과정에서 정책 담당 관료 이상으로 좌절도 느꼈다.
그런데 현 정부는 2월 6일 2000명 증원 계획을 발표했다. 증원 자체를 거부했고, 심지어 정원 축소를 주장하기까지 했던 대한의사협회를 비롯한 의사단체들의 입장에서는 기가 찼을 것이다.
어찌 보면 의사의 편이라고 여겨질, 그래서 간호법도 거부했던 현 정부가 이렇게 '반의사(反醫師)적' 정책을 밀어붙이리라고는 전혀 예상 못했을 것이다.
일부는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의 정치적 의도가 의심되지만 이는 의료정책을 전공하는 필자가 판단 또는 언급할 부분은 아니다.
'증원 불가' 주장은 의사들 오만이자 오판
오랜 기간 이 주제를 분석하고 다뤄온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의과대학은 ‘증원’ 자체가 핵심이고 그 ‘규모’는 부차적이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의사단체는 확고하게 '증원 불가'를 외쳤다. 적정 증원 규모를 제시해 보라고 해도 묵묵부답이었다. 오히려 줄여야 한다는 얘기도 가끔 나왔다. 이는 오만이자 오판이었다.
우선 너무 오만했다. 의사협회는 의대 증원이 본인들의 '허락' 사항이라고 믿었다.
의료정책의 최종 결정은 정책 담당자의 몫이다. 의사가 중요한 전문가이자 파트너인 건 맞다. 그러나 서로 경쟁과 협력을 병행하는 다양한 의료인력의 하나일 뿐이다.
그간 몇 번의 실력 행사를 통해 자신감이 붙었는지, 일부 의사 회원의 막말은 도를 넘었다.
더 큰 문제는 의사 부족을 보여주는 통계를 무작정 부정하는 억지 주장이 통할 것이라는 오판이었다. 오판하지 않았더라면 2000명 증원이라는 본인들이 느끼는 참사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대한의사협회 집행부는 증원을 반대하면서 패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몇백 명 증원을 합의하는 것보다 회원 정서에 부합한다 느꼈으리라.
의사, 총량도 부족하고 분포는 더 문제
필자가 그간 제기한 의대 증원의 논거 중 일부를 말하기에 앞서 한 가지 강조할 것은 정원 확대는 문제 해결의 필요조건이라는 점이다. 정원 확대만으로 필수의료가 해결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첫째, 우리나라의 인구 1000명 당 임상의사 수는 2.2명(한의사 포함 2.6명)이다. 이는 OECD 평균 3.7명의 절반을 갓 넘는 수준으로, 터키와 함께 꼴찌를 다툰다.
우리의 의대 졸업생 수는 인구 10만명당 5.9명(한의대를 포함 7.3명)으로 OECD 평균 14.2명의 절반 이하다.
인구 대비 의사배출 인력이 줄어드는 거의 유일한 국가다. 지난 2007년 의대 입학정원을 3058명까지 줄인 결과가 몇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저량(stock)도 꼴찌인데 늘어나는 유량(flow)도 꼴찌다.
그런데도 의사 측은 몇십 년 지나면 우리의 의사 비율이 OECD 평균을 넘어선다고 한다. 억지 주장이다. 이건 산수의 문제다.
둘째, 총량 부족의 통계를 부인하기 힘들 때 의사 단체가 의대 증원 논의를 피하는 수단으로 가장 많이 동원하는 수사가 '분포가 문제지, 총량이 부족한 게 아니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의사 수는 '총량도 부족하고 분포는 더 문제'라고 하는 게 옳다.
셋째, 우리 국민의 의료수요는 다른 나라에 비해 높다.
급속한 고령화로 만성질환자도 늘고 의료수요는 급격히 팽창하고 있다. 우리나라 의사는 1인당 연간 6000명 이상의 환자를 본다. OECD 평균 1700명의 3~4배다.
앞으로 인구가 줄어들 것이라고 하지만 이런 인구 고령화와 개인 의료수요 증가에 비하면 그 영향은 미미하다.
이제 2025년 의과대학별 정원은 이미 교육과 입시의 장으로 넘어갔다. 정원 확대는 필수의료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다. 그것도 10년 후에나 본격적인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의사의 충분한 공급이 지역사회 의료 접근성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라도 이제 소모적 논쟁을 넘어 건강보험 보상체계 개편 등 의료제도 개혁에 매진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