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의료계 간 불신의 고리가 끊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교육부가 최근 의대 평가기관인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신뢰성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다시금 의료계 내부적으로 공분이 들끓고 있다. 의료계는 역으로 정부의 의대 지원 방안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있다.
여기에 의료계 내부적으로 기성세대와 전공의 등 젊은의사 간 입장이 확연히 다르면서 현 의료사태 해결은 갈수록 요원해져 간다.
의료계, 청문회서 드러난 정부 대책 불신
지난달 26일 열린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의료계 비상상황 청문회를 기점으로 의정 간 공방은 다시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청문회에서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근거 및 결정 과정 부실이 부각됐고, 정부는 여전히 마땅한 의료사태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청문회 이후에는 2000년 의약 분업 이후 의대 정원 감축과 의료현안협의체 내 증원 논의 여부에 대한 논란까지 재차 벌어졌다.
결국 의대 교수들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휴진 투쟁을 이어 가게 됐다.
현재 연세의료원 산하 3개 병원이 무기한 휴진을, 서울아산병원이 진료 재조정을 진행 중이며, 고대의료원과 충북대병원은 각각 이달 12일과 26일부터 무기한 휴진에 돌입할 예정이다. 이달 26일에는 의료계 대토론회 개최로 전국적 휴진이 또 한 번 예상된다.
최창민 전국의과대학 교수 비상대책위원회(전의비) 위원장은 대토론회 개최 결정 직후 "청문회를 보고 의료발전을 위한 전 직역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교육부, 의평원까지 불신…의대 교수들 강력 반발
최근 교육부 차관 발언은 이 같은 상황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됐다.
오석환 교육부 차관은 지난 4일 의대 교육 관련 긴급브리핑에서 의평원을 향해 "중립적이고 공정한 업무 수행을 위해 의평원은 의사로 편중된 이사회 구성 다양화와 재정 투명성 등을 포함, 운영상의 적절성 확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안덕선 의평원장에 대해 "각 대학이 준비 중인 상황을 무시한 채 교육 질(質) 저하에 대해 근거 없이 예단, 지속적으로 불안감을 조성한다"며 직격했다.
의료계에서는 그간 의대 정원 확대로 인해 당장 내년도부터 다수 의대가 의평원의 평가인증을 통과하지 못할 것으로 내다봤고, 이에 정부가 의평원을 압박할 것이란 우려가 지속 제기됐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이미 의평원의 평가기준을 조정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이 와중에 교육부가 직접적으로 의평원을 공격하자 의료계는 "우려가 현실화됐다"며 발끈했다.
지난 5일 서울의대‧울산의대‧성균관의대‧연세의대‧고려의대‧가톨릭의대는 각기 성명을 내고 오 차관 발언에 항의하며 중립적 평가기관인 의평원에 대한 압박을 당장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가장 먼저 성명을 낸 가톨릭의대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는 "무리한 의대 증원이 교육 질을 떨어뜨리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다면 오히려 의평원에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으로 평가해달라고 자신감을 보여야 한다"며 "의평원을 정부 압력으로 굴복시키려는 듯한 차관의 발언에 대해 즉각 사과를 표명하라"고 요구했다.
특히 교육부가 의평원 이사회 구성의 의사 편중이 심하다며 공익대표 참여를 권고한 것에 가톨릭의대 비대위는 "선진국 의학교육평가원 이사회 구성을 한 번이라도 들여봤다면 그런 발언을 할 수 없다"며 "의학교육에 대한 정부의 몰이해를 확인할 수 있다"고 힐난하기도 했다.
현재 의평원 이사회는 총 22명으로 이뤄진 가운데, 18명(81.8%)가 의사다. 이는 미국 의대 평가인증 기관인 'LCME'의 이사진 21명 중 16명(76.1%)이 의사인 것과 비교해 비슷한 수준이며, 일본 의대 평가인증 기관 'JACME' 이사진 19명 중 18명(94.7%)이 의사인 것보다 낮은 비율을 보인다.
더군다나 안덕선 의평원장은 데일리메디와의 통화에서 "의평원은 이사회가 평가인증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구조가 전혀 아니"라며 "교육부 우려는 기우(杞憂)"라고 일축했다.
서울대‧울산대‧성균관대 의대 교수 비상대책위원회는 공동성명서에서 "이사회에 소비자 단체 등을 포함시켜 달라는 요구는 정부가 의평원 심사 업무에 관여하겠다는 노골적인 중립성 훼손 책략"이라며 "정부가 증원해도 의학교육의 질적 저하가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기존의 기준대로 각 의대가 심사받게 하라"고 촉구했다.
전공의‧의대생, 의협 불신감 커 올특위 역할 미미
불신의 골은 의료계 내부에서도 깊어지고 있다.
의료계는 대화창구를 단일화하고자 범의료계 협의체인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이하 올특위)를 출범했으나, 정작 주요 당사자인 전공의와 의대생 참여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전공의와 의대생들은 임현택 의협 회장의 과격한 언사와 지난 5월 제시한 3대 요구안을 강하게 비판하며 불참 의사를 내비쳤다.
의대생 단체인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학생협회(이하 의대협)은 지난 2일 보도자료를 내고 "임 회장은 당선 당시 의대생들을 위한다고 했지만 당선 후 의대생들 이야기를 들으려는 노력을 조금도 하지 않고 있다"며 "의대생들은 이미 대정부 8대 요구안을 제시했음에도 임 회장과 집행부는 이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채 자의적으로 3대 요구안을 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올특위를 비롯한 임 회장의 독단적 행보를 수용할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며, 학생들은 외부에 휘둘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판단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의협은 최근 전공의 및 의대생을 대상으로 한 간담회를 시작하고, 6일 열리는 올특위 3차 회의에 전공의와 의대생의 참관을 신청받는 등 소통을 위해 나섰지만, 의료사태가 5개월을 넘어가는 시점에 뒤늦은 대책이 아니냐는 지적도 따른다.
이처럼 정부와의 대화창구로 기대됐던 올특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이 의정 관계는 갈등을 넘어 체념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