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의사인력 부족과 필수의료 기반 확충을 명분으로 정부가 추진하는 의과대학 입학정원 증원 정책과 필수의료 패키지는 인내하기 힘든 사회적 혼란과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했다.
의사 부족 근거로 제시한 추계 결과와 그 결정 과정에 대한 이해관계자 상호 간의 신뢰도 무너졌다.
의료계가 제안한 대안적 방법을 외면하고 전문의 배출까지 오랜 기간이 소요되는 의과대학 입학정원 대규모 증원을 결정한 정부의 의도를 알 수 없다.
과정은 공정하지 않았으며 이해력 및 판단력, 사리 분별력으로 표현되는 우리 상식은 깨졌다.
문제의 출발은 보건의료 발전 종합계획 부재와 의료인력 수급 정책을 다루는 관리형 거버넌스다. 많은 전문가단체가 의료인력 수급 정책을 다루는 새로운 거버넌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 의료인력 수급 추계 결과에 대한 수용성을 높이고, 사회적 갈등을 줄이기 위해 인력 수급 추계・조정시스템을 구축한다는 의료개혁특별위원회 발표는 진일보한 것이다.
정부가 발표한 거버넌스는 '의료인력수급추계센터'를 보건사회연구원 산하에 설치해 3년마다 추계를 하고 추계 모형설정 및 추계결과 검토, 정책을 제안하는 '수급추계전문위원회'를 공급자 추천 과반수로 구성해 운영하며 의사 결정 기구로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 추계 관련 자문이나 추계 결과 및 정책 제안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는 '직종별 자문위원회'를 운영하는 것이 골자다. 의료인력 수급 추계와 의사결정 거버넌스를 단기간에 완전하게 구축하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럼에도 정부가 이번에 발표한 의료인력 수급 추계・조정시스템이 사회와 의료계 신뢰를 바탕으로 건설적으로 기능할 수 있을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협의와 합의에 기반한 '의사 결정 거버넌스' 절실
의료인력 수급 정책 관련 이해관계자가 의사 결정 거버넌스 의미에 대해 공통의 인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거버넌스는 영어 단어 ‘Governance’를 외래어 표기법 또는 관용 표기에 따라 사용한 단어다. 다양한 맥락에서 오늘날 거버넌스 단어에 가장 잘 부합하는 개념은 협의와 합의다.
단어가 정확하면 소통성은 비례해 올라가므로 정확성이 중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거버넌스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개념을 이해하고 공유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출발이다.
그러나 정부 발표는 직종별 위원회를 자문위원회 성격으로 격하했으며, 최종 의사 결정 권한은 전문가 단체 의견이 반영되기 어려운 구조인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에 부여하고 있다.
사실상 앞서 설명한 협의와 합의 개념을 전제로 하는 거버넌스가 보이지 않는다. 작금의 의료인력 수급 정책 의사결정 거버넌스는 절대적 권력에 의한 관리와 통제 개념으로 이해될 여지가 있다.
중요한 것은 절차적 명분을 위한 형식적 과정이 아닌, 다양한 이해관계자 의견을 수렴하고 과학적 근거에 기반해서 합리적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것이다.
과학적 근거를 생산하는 인프라 구축
의료인력 수급 정책을 몇 가지 지표나 사회적 정서에 의존하기보다는 과학적 근거에 기반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현존하는 모든 자료를 체계적으로 검토해서 고찰, 정책의 경제적 영향을 평가하는 경제성 분석, 어떤 정책이 더 효과가 있는 지 비교 효과 연구 등이 과학적 근거를 생산하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따라서 의료인력의 부족과 과잉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주기적으로 생산해 내는 일이 중요하다.
한국에서는 OECD 자료, 의료인력 수급 추계 보고서 등 일부 자료를 제외하고는 의료인력 수급 추계와 관련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고찰, 정책의 경제성 분석, 대안 정책에 대한 비교 효과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정부는 단기적으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산하에 의료인력수급추계센터를 설치해 의료인력 수급 추계를 시행하고 중장기적으로 미국의 보건의료자원서비스청(HRSA) 또는 프랑스의 국립보건전문직인구통계관측소(ONDPS)와 같은 기구를 추진한다고 하니 그나마 반가운 일이다.
그럼에도 의료인력수급추계센터를 정부 산하에 둔다는 점에서 민관합동의 독립기구 설치를 요구하는 의료계 인식과 괴리가 있다. 과학적인 근거를 지속해서 생산해 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전문가 의견 존중 필요
정부는 의료인력 수급 관련 의사 결정에 정부와 소비자, 공급자, 그리고 전문가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민주주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반면, 전문가단체는 의료인력 수급 관련 의사 결정은 수많은 불확실성과 가치 상충이 있으므로 올바른 결정을 위해 전문가 중심의 의사 결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해답은 전문성과 민주성 사이 그 어느 지점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료계 전문가를 여러 이해관계자의 한 명으로 보면 안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들은 한국 의료와 의료인력 수급과 관련한 쟁점을 가장 잘 인식하고 해결 대안을 가진 현장 전문가이다.
또한, 의료계에 종사하는 전문가 대부분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준수하고 이타적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다. 비록 소수가 다른 시각으로 의료인을 바라볼지라도 대부분은 의사를 신뢰하고 자신을 맡긴다.
일본 의사인력수급분과회, 네덜란드 의료인력계획자문위원회, 호주 의료인력개혁자문위원회는 전문가주의 개념에 기초해 위원 상당수를 의료계 전문가로 구성하고 있다. 이처럼 전문가 의견이 중요하게 반영되는 거버넌스가 구축돼야 한다.
투명한 의사 결정 과정과 책임 의식
투명해야 공정하고, 공정해야 투명할 수 있다. 투명성 핵심은 의사결정에 사용한 자료와 논의 과정을 있는 그대로 공개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의료인력 수급정책과 관련된 자료, 논의 과정, 그리고 의사 결정 회의록이 투명하게 공개되었는지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의료인력 인력 수급 추계에 관한 연구가 비공개로 처리되거나 의료인력 수급 정책 의사 결정을 위한 회의 자료와 회의록에 대한 접근이 제한된 경우가 많았다.
정부 관계자는 "회의록 작성 의무가 없다"고 밝혔다. 회의 자료 또는 회의록이 파기됐다고도 말한다. 투명성은 이해관계자 상호 간에 신뢰 구축 및 협의와 합의를 만들어 가는 출발점이다.
일본 의사수급분과회가 2015년 이후 40여 차례 모든 회의자료와 회의록을 온라인에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는 점은 우리와는 너무 상반된다.
의료인력 수급정책과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전문성이 떨어지거나 신념과 사명감이 부족한 사람이 종종 있다. 이들은 의사 결정 결과에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미래 어떤 시점에 의사 결정 결과에 책임을 갖는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의사 결정을 위한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고 과학적 근거에 기반해 신중하고 논리적으로 결정을 하며, 그러한 결정을 다양한 이해관계자 및 사회와 공유하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신념과 사명감을 가지고 의사결정 결과가 성공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의료인력 수급 정책에 관한 거버넌스에 참여하는 이해관계자는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
'의료인력 정책' 탄탄한 민관협력 체계 필요
의료인력에 대한 수요와 공급은 인구집단의 특성, 진단 및 치료 기술 발전, 그리고 의료정책과 의료전달체계 등 국가 보건의료 발전계획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그렇기에 수급 정책은 종합적이고 중장기적인 보건의료 발전 계획 맥락에서 추진돼야 한다.
이와 함께 세계보건기구의 언급과 EU에서 발간한 의료인력계획방법론에서 강조한 이해관계자 참여와 합의 중요성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의료인력 수급 정책의 효과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평가될 것이기에 불확실성을 전제로 한다.
불확실성은 값비싼 실패(costly failure)로 귀결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에 근거에 기반하고 전문가 의견이 반영되는 탄탄한 민관협력 거버넌스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거버넌스는 의료인력 수급 추계와 관련한 의사 결정을 뛰어넘어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의료인력 양성, 지원 및 관리를 위한 거버넌스가 돼야 한다.
※ 본 칼럼은 의료정책연구원에서 발간한 ‘의사 단체행동의 윤리적 고찰’에 기고한 내용과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