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료’, ‘필수의료’에 이어 우리나라 의료에서 복지부가 창조한, 그렇지만 정의하기 어려운 용어가 다시 등장했다. ‘전문의 중심 병원’이란 단어다.
상급병원이라면 전문의에 의한 진료가 재차 강조될 필요 없이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상급종합병원을 전문의 중심병원으로 구조 전환을 한다는 정부 주장이 분명한 목적과 실현 가능한 것인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우리나라 보건의료 기본 철학은 군사정권의 저소득층을 위한 시혜(施惠)로 출발했다. 의료보장제도가 19세기말부터 발전해온 유럽 선진국의 질병 기금이나 상호공제조합의 사회연대 개념이나 인간 기본권 개념과는 궤적을 달리하고 있다.
경제 여건이 충분하지 못한 우리나라에서 전(全) 국민 의료보장을 달성하기 위해 의료보험제도는 초저수가와 비급여를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의료는 싸고 빠른 전문의 진료가 근간을 이뤘는데 이제야 새삼 상급병원이 전문의 중심병원이라는 혼란스러운 구조 전환을 해야 한다는 것이 개혁의 의제로 등장한 셈이다.
적자 보전 없는 민간병원, ‘전문의 중심 병원’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전문의 중심이란 단어는 1차 진료나 일반의 중심 진료에 대응하는 언어가 아니다. 상급병원에서 전공의 의존도를 낮추는 것이 개혁의 목적이다.
전공의 집단 사직의 여파를 경험한 정부는 대학병원의 전체 의사 수 대비 전공의 수가 선진국에 비해 월등히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에 전공의가 아닌 전문의 고용을 늘려 의료 질과 수련의 질을 함께 높이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제까지 대학병원이 충분한 전문의를 확보하지 못한 이유는 우리나라 의료의 전반적인 문제인 초저수가 제도와 이로 인한 박리다매식의 영리추구 경영방식 때문이다.
즉, 공적 사회보험제도인 의료보험제도하에서 의료기관은 모두 비영리병원임에도 불구하고 의료수입에 초과 이익금이 발생해야 의료기관의 운영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적자를 보전해주는 공공의료기관과 달리 우리나라 의료서비스 공급의 주된 역할을 하는 민간의료기관에는 정부가 적자 보전을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공공의료’ 개념은 의료보험제도상 제공되는 의료서비스로 국공립 의료기관이나 민간의료 기관 모두가 제공하는 의료서비스인데, 공공의료기관에만 특화된 지원 정책을 취하고 있다.
민간병원은 초과 이익 없이 병원의 운용이나 확대 재생산, 시설투자, 의과대학 지원 등은 불가능하다. 우리나라 의과대학의 75%는 사립 의과대학이다.
전공의를 많이 확보할수록 저임금에 최소 주당 80시간 근무를 요구하니 병원 경영상 너무나도 필요한 의사들이다. 국내 수련병원 221곳에서 근무하는 인턴과 레지던트를 포함한 전공의는 1만2774명으로 전체 의사의 11.4%을 차지하고 있다.
2023년 12월 기준 빅5 병원 소속 의사 가운데 전공의 비중은 39%이고 상급종합병원에서 근무하는 전문의는 전체 9만5852명 중 1만4255명으로 15% 수준에 불과하다.
입원환자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입원전담전문의제도는 2023년 9월 말부터 상급종합병원 7개소에서 운영을 중단했고 입원전담전문의는 2023년 6월 363명에서 9월 312명으로 감소했다. 입원전담전문의 빈번한 당직, 낮은 입원전담전문의 수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특히 지역병원에서 입원전담전문의 제도 운영 포기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정부는 상급종합병원의 전공의 감소를 보완하기 위한 입원전담전문의 제도 활성화가 필요한데 구체적 계획은 없다.
전제 75% 의과대학이 사립인데 정작 정부는 국립의대에 1000명의 전문의 고용으로 구조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대부분이 민간에 의존하는 우리나라의 공공의료 특성에서 국립대에만 전문의 채용 지원을 한다는 사실도 수용하기 힘들어 보인다.
적자 보전에 대한 정부의 재정적 준비는 돼 있는지도 궁금하다. 정부는 아직도 공공의료 개념을 국·공립의료기관이 생산한 의료로 곡해하고 있는 것 같다. 사립대는 전문의 인원 확충을 유도한다고 하면서 국립대와 차별적 정책을 취하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앞서 ‘의료소비 통제’ 필요
상급종합병원 구조 개선을 위해 고려할 사항은 진료 환자의 절반 이상은 1차 의료가 담당해도 된다는 것이다. 대학병원 외래구조는 현재 1차 진료 기관과 경쟁을 하고 있는 구도인데 반드시 이를 개선을 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이미 형성돼 있다.
그러나 이미 진료권역의 폐지와 의료보험 통합으로 지역의료보다 수도권 의료를 선호하는 국민 요구는 어찌할지, 이에 강한 행정적 조치를 도입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이에 더해 속칭 ‘표심 잡기’에 방해가 되는 정책에 정치인들이 나설지도 의문이다. 우리나라 환자는 3차병원 진료를 마친 후 회복을 위해 2차 병원급으로 보내는 것도 쉽지 않은데 말이다.
의료보험이 사회보험임을 분명히 하는 나라는 의료전달체계도 법제화돼 있어서 2차 병원의 직무까지 법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대학병원의 경영논리 원칙에 의해 최소 인건비로 최대 근로를 생산하는 우리나라 전공의 제도는 전공의 교육수요가 사회적 필요에 의한 산정이 아닌 의국과 병원 그리고 대학의 양적팽창을 위한 수단으로 변모됐다. 때문에 대학병원들은 전공의 의존도가 높은 구조가 됐다.
대학병원이 진정 전문의 진료를 바탕으로 질적 향상을 도모하려면 우선 고전적인 의료전달체계를 구축하고 이를 위해 지역 1차진료 강화 및 진료권 제도 부활 등 의료소비 통제가 필요하다.
역대 정권은 국민만 바라본다며 사회의료보험 제도와 반대되는 의료소비를 조장하는 정책을 정부 주도로 허용해왔다.
초저수가제를 고수하는 나라에서 과연 늘어난 교수 인건비 조달은 가능할지도 궁금하다.
현재 국립의대에 1000명을 지원한다는 전문의중심 병원 정책은 10개 국립 의과대학당 100명 정도의 증원이다.
이와 비교해 미국의 대형 의과대학의 임상교수는 통상 1500명에서 3000명 정도다. 미국 하버드의대와 같이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임상교수가 1만1000명이 넘는 기관도 있다.
북미 기준 통상 대학병원 규모가 500병상 이상인 경우 500~1000명의 임상교수가 필요하다. 전문의 중심 병원이 되려면 어떤 규모여야 하는지 간접적 파악이 가능하다.
영국 역시 2차 병원인 지역병원(District Hospital)만 해도 전국에 150~170개 정도 있는데, 통상 300~600병상이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병원당 약 300명의 컨설턴트(전문의)가 필요하다. 영국 의과대학의 대형병원은 통상 800~1200병상인데 컨설턴트는 400~1000명이 근무한다.
교수 충원에 있어 국립대만 지원해 주는 부분도 우려된다.
사회보험제도에서 전공의 교육은 국가책임이다. 국공립 공공기관의 적자 면죄부 특권에 전공의 교육 차별화로 더욱 특권화가 강조되고 있다. 모순의 연속이다.
더군다나 환자 쏠림 주역인 빅5 병원 중 공공기관은 서울대 한 곳 뿐이다. 그런데도 국립기관으로 한정된 교수 채용의 확장은 과연 수도권에 어떤 기여를 할지도 미지수다. 국립대병원 한 곳에 대한 전공의 수 감소와 배분 정책도 실제로 구체화하기 쉽지 않다.
세계 최다 병상 보유→‘지역의료 이탈’ 심화시켜
국립의대에 100명의 임상교수를 늘리고, 전공의 수를 줄여 전공의 교육이 내실을 기한다는 주장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부가 필수의료 정책패키지에 담았듯이 의료개혁을 위해 전공의 교육을 ‘역량 바탕 의학교육’으로 방향을 제시했는데 증가된 교수진은 역량 바탕 의학교육에 대한 교육 전문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임상교수를 교수개발을 통해 진정한 의학교육자로 전환시키는데도 상당한 재원을 요한다. 역량 바탕 의학교육의 구현에는 지금보다 휠씬 더 많은 시간적 재정적 투자가 전공의 교육에 필요한데, 이런 측면도 충분히 고려된 것인지 구체적 계획은 보이지 않는다.
전문의 중심병원이라는 모호한 정책추진과 동시에 정부는 이미 민간 대형병원의 분원설치로 최소 6600병상을 허가했다.
이미 세계 1위 병상 보유량에도 더 병상을 늘리고 있는데 이런 조치는 대형병원 분원으로 의료인력, 의료자원 쏠림을 가중화시킬 우려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전문의 중심병원 정책은 지역의료 이탈을 부추겨 결국 지역의료 살리기와는 배치될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지방의대 교수 이탈 현상은 현재 진행형이다.
상급종합병원을 진정한 3차 진료기관으로 전환하자는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런 논의는 오래 전부터 해왔으나 정부의 구체적 정책이나 주도적 역할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정부가 진정 대학병원을 전문의 중심병원으로 전환하려면 높은 전공의 의존도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이 우선돼야 한다.
공정보상 제도와 이미 비대해진 병상관리 그리고 상종병원에서 교수 증원과 전공의 수 감소에 따른 타 보건의료인 증원 효과를 감안한 재정적 부담과 역량바탕 의학교육 전환에 소요되는 상당한 재원이 필요하다. 아직 전문의 중심병원 구현을 위한 정책 구체성은 초기 단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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