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킨슨병 치료제로 많이 쓰이는 L-도파(levodopa)도 예외는 아니다.
도파민의 전구물질인 L-도파가 파킨슨병 환자의 뇌에 제대로 작용하면 병으로 부족해진 도파민을 보충할 수 있다. 하지만 L-도파가 실제로 환자의 뇌에 도달하는 비율은 투여량의 1% 내지 5%에 불과하다.
L-도파를 투여해도 이렇게 극히 적은 양만 뇌에 도달하는 이유를 미국 하버드대 과학자들이 밝혀냈다. 위장에 서식하는 미생물들이 약물을 차단한 뒤 뇌까지 가지 못하게 약물의 화학적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미국 하버드대 화학·화학생물학과의 에밀리 발스쿠스 교수팀은 최근 이런 내용의 연구보고서를 저널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했다. 장내 미생물의 이런 작용이 과학적 실험을 통해 확인된 건 처음이다.
하버드대가 24일(현지시간) 온라인( 링크 )에 공개된 보고서 개요를 보면, 연구팀이 '인간 미생물체 프로젝트(Human Microbiome Project)' 결과와 L-도파 실험을 통해 찾아낸 장내 미생물은 E.패칼리스(Enterococcus faecalis)와 E.렌타(Eggerthella lenta) 두 종이다.
과학자들은 이에 앞서 L-도파가 뇌에 이르기도 전에 도파민으로 변하는 부작용을, 장의 효소들이 일으킬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L-도파를 보호하려고 카비도파(carbidopa)라는 약물을 추가로 써 봤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카비도파는 말초 신경에서 L-도파를 도파민으로 바꾸는 효소를 억제한다. 그래서 카비도파와 L-도파를 함께 투여하면 뇌에 더 많은 도파민이 생긴다.
이러던 차에 장에서 L-도파의 발목을 잡는 특정 미생물들이 발견된 것이다. 이들 세균은 한팀을 이뤄 L-도파가 뇌로 가는 걸 방해했다.
장에서 L-도파가 도파민으로 바뀌게 작용하는 건 E.패칼리스였다. 배양 실험에선 E.패칼리스가 L-도파를 남김없이 먹어치우는 게 관찰되기도 했다.
E.렌타는 L-도파가 변해서 생긴 도파민을 먹어치운 뒤 부산물로 신경조절물질인 메타-티라민(meta-thyramine)을 생성했다.
말초 신경에서 L-도파의 도파민 전환을 억제하는 카비도파도, 장에서 같은 작용을 하는 E.패칼리스에는 힘을 쓰지 못했다.
발스쿠스 교수의 지도 아래 제1 저자로 연구에 참여한 마이니 렉달 박사과정 연구원은 "약물은 체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갑자기 독성 물질로 변할 수도, 생각만큼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결과는 파킨슨병과 L-도파만 들여다본 것이지만, 다른 약물에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고 한다. 연구팀은 E.패칼리스의 L-도파 분해를 막는 AFMT라는 물질을 이미 찾아냈다.
발스쿠스 교수는 "L-도파를 쓰는 환자들 사이에서 효과와 부작용이 극적으로 다른 건 장내 미생물 때문이라는 걸 시사하는 결과"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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