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세포와 B세포는 과거에 침입한 적이 있는 병원체가 다시 들어왔을 때 면역계가 이를 식별하게 하는 '면역 기억'에 깊숙이 관여한다.
이런 유형의 '훈련된 면역력(trained immunity)'은 영향을 미치는 범위가 넓지만, 효과를 내는 기간은 짧다. 그래도 인체 조직을 구성하는 세포는 일반적인 염증 기억을 이용해 새로운 감염 위협에 반응한다.
'염증 기억(inflammatory memory)'은 이전에 겪은 염증이 다시 생겼을 때 세포가 더 효율적으로 반응하는 걸 따로 지칭하는 말이다.
예를 들면 전에 노출됐던 독성 물질이나 병원체가 다시 침입할 경우 피부의 상처가 더 빨리 낫는 건 염증 기억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현상으로만 관찰됐던 염증 기억의 작동 메커니즘을 미국 록펠러대 과학자들이 밝혀냈다.
과학자들은 염증 기억이 다양한 유형의 거의 모든 세포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걸 확인했다.
실제로 인간 피부와 생쥐 상피 줄기세포에서 분리한 NK(자연 살해) 세포, T세포, 수지상세포 등에서 모두 이 현상이 관찰됐다.
이 연구를 수행한 일레인 퓨크스(Elaine Fuchs) 세포 생물학 교수 연구팀은 지난 27일(현지 시각) 저널 '셀 스템 셀(Cell Stem Cell)'에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앞서 퓨크스 교수팀은 2017년 '염증 기억'의 효과를 입증한 생쥐 실험 결과를 저널 '네이처(Nature)'에 논문으로 발표했다. 연구팀은 당시 염증 기억을 설명하는 가설로, 피부 세포 유전체의 후성 유전 변화를 제시했다.
DNA에서 히스톤 단백질을 단단히 휘감았던 염색체 구간이 염증으로 풀리면서 외부 공격에 대한 유전적 반응이 전사된다는 게 요지였다.
또 한 번 풀린 '메모리 도메인(memory domains)'은 염증이 가라앉은 뒤에도 개방 상태로 남고, 일부 히스톤 단백질이 변형하면서 노출된 DNA 구간에 전사 인자가 결합한다고 봤다.
이번 연구의 핵심 성과는 가설로 제시된 일련의 과정이 실행되는 분자 메커니즘을 규명한 것이다. 연구팀은 생쥐 피부를 자극성 물질에 노출했다. 그런 다음 피부 줄기세포 DNA의 어느 '메모리 도메인'이 염증 전후에 모두 접근할 수 있는지 탐색했다.
수개월 간 5만여 개의 DNA 구간을 관찰한 끝에 조건에 맞는 약 1천 개의 도메인을 찾아냈다. 흥미롭게도 이들 도메인 가운데 다수는 염증 초기 며칠간 가장 두드러지게 풀렸던 구간과 일치했다.
좀 더 파고들어 갔더니 훈련된 면역의 심장부에서 작동하는 2단계 메커니즘이 모습을 드러냈다. 중심축 역할을 하는 건 'JUN & FOS'로 알려진 쌍둥이 전사인자였다.
먼저 자극 특이(stimulus-specific) STAT 3 전사인자가 나서 특별한 유형의 염증에 대한 유전자 반응을 조율한 뒤 JUN-FOS에 바통을 넘겼다.
FOS는 소동이 진정되자 자리를 벗어났다. 하지만 JUN은 다른 전사인자 무리를 이끌고 개방된 메모리 도메인을 지키며 다음 전투에 대비했다.
같은 자극물이 다시 공격하면 JUN은 FOS를 데리고 신속히 메모리 도메인으로 돌아가 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이런 '염증 기억'이 항상 인간의 건강에 이로운 건 아니다. 예컨대 만성 염증 질환에선 일종의 '분자 편집증(molecular paranoia)'을 일으킬 수도 있다.
연구팀이 전신성 경화증 환자의 임상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JUN 전사 인자가 손상된 세포의 메모리 도메인에 발현한다는 증거가 나왔다.
퓨크스 교수와 동료 과학자들은 이번 발견이 만성염증질환 등의 효과적인 치료법 개발로 이어지길 희망한다.
확인된 전사 인자와 분자 경로는, 만성 염증을 유발하는 염증 기억의 상기를 억제하는 표적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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