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디 한해진 기자] #대학병원에 근무하고 있는 A교수는 최근 당황스러운 일을 겪었다. 녹음기를 갖고 진료실에 들어온 환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A교수는 “상태가 좋지 않아 진료 내용을 기억하지 못할 것 같다며 녹음을 해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하는 환자는 종종 있었지만 요즘은 당연하게 녹음기를 가져오는 환자들이 늘고 있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흉부외과에 근무하고 있는 B교수는 “녹음이 불법인 것도 아니고, 병원과 의료진의 설명 의무가 강조되고 있는 분위기도 이해하지만 아무래도 녹음기 앞에서는 형식적인 얘기만으로 진료를 마무리하게 된다”며 “결국 진료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는 자료로 활용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어떻게 하면 트집을 잡히지 않을까 고민하며 두루뭉술한 답을 할 때도 있다”고 밝혔다.
#C교수는 얼마 전 수술을 끝낸 환자로부터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후유증이 발생했다"며 항의를 받았다. 수술 전 진료내용을 녹음한 환자가 이를 증거 삼아 따져물은 것이다. C교수는 "수술 부위의 통증이 발생하는 경우는 예상 가능한 것이고 의료진과 상담을 통해 대처하면 되는데 몰래 녹음한 내용까지 증거로 가져올 줄은 몰랐다"며 당혹감을 보였다.
의사의 진료행위 설명의무 강화법이 도입되고 환자와 보호자가 신청한 의료분쟁조정의 자동진행이 가능해지는 등 환자 권익을 위한 각종 제도들이 도입되고 있음에도 현장에서 의사와 환자 간의 거리는 별다를 것 없는 모양새다.
대표적으로 관찰되는 것이 진료 내용에 대한 녹음이다.
녹음된 진료 내용이 불리하게 작용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교수들 뿐만 아니다. D종합병원은 “얼마 전부터 환자들에게 녹음을 원하는 경우 사전에 의사에게 말해달라는 안내를 하고 있다”며 “의사는 녹음이 악용될 가능성을 우려해 불편해하는데 환자들은 이를 두고 폐쇄적이라며 오해할 수 있어서 이런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E대학병원은 “공개적으로 진료 내용을 녹음하는 것은 합법이기 때문에 막을 수 없지만 의사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녹취는 후에 문제가 될 수 있어서 금지해 왔다”고 설명했다.
녹음 행위에 대해 환자와 의사 모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병원에서 벌어지는 각종 의료분쟁에 대한 여론의 따가운 눈총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E대학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 교수는 “과거에는 의료분쟁 중에서도 법적 다툼이 큰 사건이 주로 공개되곤 했는데 요즘은 국민청원을 비롯해 각종 커뮤니티에서 조정 중에 있는 의료분쟁도 전적으로 병원의 책임처럼 공론화되는 경우가 잦다”며 “이런 상황에서 녹음 시도가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의사들을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D병원 관계자도 “의사와 병원의 의료배상책임보험 의무가입 주장이 등장하고 의료 사고에 대한 형사처벌이 늘어나는 등 의료진을 옥죄는 규제가 강화되다 보니 녹음 같은 것에도 조심스럽게 반응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의사들은 진료시 환자와의 소통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A교수는 "진료하는 교수들의 논문까지 직접 찾아 읽고 특정 시술법을 요청하는 환자의 모습은 더 이상 드문 일이 아니다"라며 "적대적으로 맞서기보다 환자들이 의사의 설명을 납득할 수 있게끔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기술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한해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