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박대진 기자]중국에서도 가장 추운 동북 지역에 위치한 하얼빈(哈爾濱). 만주어로 ‘그물 말리는 곳’이라는 뜻의 하얼빈은 19세기 무렵까지 불과 몇 채의 어민 가구가 사는 한촌(寒村)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은 기계공업 도시로 눈부신 발전을 이룬 하얼빈은 우리 민족에게 벅찬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면서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각인시킨 그 곳. “내가 죽은 뒤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돌아와 매장해 달라”는 동포에 고함을 아직도 실천하지 못한 가슴 먹먹해지는 그곳이 바로 하얼빈이다. 이 역사의 현장에서 매년 9월이면 고국인 ‘한국’과 조국인 ‘중국’을 한가슴에 품고 사는 조선족의 최대 문화축제가 열린다. 재단법인 유나이티드문화재단이 후원하는 ‘홈타민컵 조선족 어린이 방송문화 축제’. 햇수로는 16년, 횟수로는 14번째인 이 행사는 중국 전역의 조선족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축제의 장으로 거듭났다.[편집자주]
조선족 최대 문화축제의 태생은 우연이었다. 아니 어쩌면 필연이었을지 모른다. 한국 제약회사와 중국 조선족의 인연은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출발했다.
잊혀가는 민족의 얼, 필연을 만들다
지난 2001년 중국 흑룡강조선어방송국에서는 ‘사랑하지 않으면 떠나라’는 제하의 칼럼이 낭독 형식으로 방송됐다. 한국유나 이티드제약 강덕영 대표의 글이었다.
물론 이 방송을 위해 쓴 글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발간한 경영 칼럼집에 실린 내용을 작가가 발췌해 방송으로 내보냈다. 이 인연이 조선족 어린이 방송문화 축제의 시발점이었다.
“조선족 어린이들이 우리말과 글을 지켜 가려면 글짓기나 말하기 대회, 노래자랑 등을 열어야 하는데 예산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선뜻 시작했습니다.”
강덕영 대표는 흑룡강조선어방송국장과 담화 중 조선족 어린이들이 점차 우리말과 글을 잊어가고 있다는 현실을 알고 민족의 정체성을 심어주자는 취지로 행사 후원을 결심했다.
중국의 56개 소수민족 중 5번째로 많은 조선족임에도 그들만을 위한,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지키기 위한 행사가 전무했던 만큼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헤이룽장성과 베이징을 비롯해 랴오닝성, 지린성 등 중국 전역에서 1000명 이상이 예선에 참여하고, 엄격한 심사를 통과한 본선 진출자가 60여 명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본선 진출자들은 행사가 열리는 하얼빈까지 최대 10시간이 넘는 긴 여정도 마다하지 않았다. 학교는 물론 해당 지역에서도 부러움을 한 몸에 살 정도로 위상도 상당하다.
무엇보다 중국 현지에서는 이 행사의 지속성에 주목했다. 2002년부터 시작된 조선족 어린이 방송문화 축제는 어느덧 16년째 이어지고 있다.
기업들의 단발성 사회환원이 즐비한 상황을 감안하면 상당히 유구한 역사라는 평가다. 이 기간 동안 조선족 어린이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꿈을 키워주는 전국 행사로 자리매김한 것은 당연지사다.
흑룡강조선어방송국 허룡호 국장은 “한 기업에서 이토록 오랜 기간 후원사업을 지속하는 게 흔치 않은 일”이라며 “민족의 얼을 지키려는 한국유나이티드제약의 결연한 의지에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물론 적잖은 세월 동안 고충도 많았다. 크고 작은 사건, 사고로 두 번이나 해를 걸러 행사를 치러야 했다. 때문에 세월은 16년이지만 행사 횟수로는 14번째다.
첫 행사 이듬해인 2003년 중국의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SARS·사스) 사태로 당시 어린이들 보호 차원에서 행사를 전격 취소했다.
또 지난 2005년 11월 화학공장 폭발로 벤젠 100여 톤이 송화강에 유입돼 지역 주민 150만명이 불편을 겪는 식수대란이 발생해 부득이 행사를 미뤄야 했다.
한국유나이티드제약 김태식 전무는 “예기치 않은 상황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조선족 동포들이 민족의 얼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지원을 지속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어 “길이 멀면 말의 힘을 알고, 긴 세월이 지나면 사람의 마음을 본다는 뜻의 ‘노요지마력 사구견인심(路遙知馬力 事久見人心)’이라는 말처럼 이 행사가 앞으로도 지속될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10시간 여정도 감내케 하는 행사
올해도 ‘홈타민컵 조선족 어린이 방송문화 축제’가 하얼빈시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 제14회 대회에는 중국 전역에서 치열한 경쟁을 통과한 64명이 본선 무대에 올랐다.
9월 15일 하얼빈 사범대 음악홀에서 열린 개막식에는 조선족 학부모와 학생 등 250여 명이 참석했다. 한국에서는 유나이티드제약 김태식 전무와, 유나이티드문화재단 강예나 대표 등이 자리를 함께했다.
중국국제방송국조선어부, 흑룡강성교육학원민족교연부, 흑룡강조선어방송국이 공동 주최한 이번 행사는 조선족 어린이들이 글짓기, 말하기, 노래, 피아노 등 4개 부문에서 우리말과 글로 실력을 겨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