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이 얼마나 급했으면 ‘응급실 불이라도 켜 놓고 있어달라’고 요청하더라구요. 의료진이 없어 기능도 못하는 응급실을 문만 열어 놓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의료현장을 좀 돌아보면 괜찮다는 것을 느낄 것’이라는 대통령 발언도 충격적이었지만 그런 인식을 만든 참모들에 더 울화가 치밀었습니다.”
의정갈등 장기화로 응급의료 붕괴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의 연이은 ‘현실 부정’ 행태로 인한 의료계의 공분이 확산되는 모습이다.
응급의료 현장은 잇단 의료진 이탈로 제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기우(杞憂)라고 치부하려는 정부에 ‘분노’하는 분위기다.
실제 최근 잇단 응급실 뺑뺑이가 빈번하게 발생하며 우려 여론이 확산되자 보건복지부는 전국 응급실 408곳 중 진료 제한이 발생한 곳은 1.2%인 5곳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를 두고 의료계는 “정부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특히 의정갈등에 전공의들이 의료현장을 떠난 지 반년을 훌쩍 넘기면서 업무에 과부하가 걸린 응급실 의료진은 응급의료체계가 ‘붕괴 직전’이라고 가슴을 쳤다.
의료계에 따르면 ‘빅5 병원’을 비롯한 서울시내 주요 대학병원 응급실 대부분이 인력난에 파행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울대병원 응급실은 정규 시간 외 안과 응급수술이 불가능하다고 알렸고, 세브란스병원은 성인·소아 외상환자 등을 수용할 수 없다고 공지했다.
서울아산병원 응급실은 인력 부족으로 정형외과 응급수술과 입원이 불가하고, 서울성모병원 응급실은 혈액내과 신규 환자를 받지 못하고 있다.
전공의들이 의대정원 증원에 반발하며 의료현장을 떠난 지가 길어지면서 남아있던 의료진이 한계에 부닥치며 현장 상황이 더 나빠진 것이다.
서울 서남권 권역응급의료센터인 이대목동병원은 응급실 당직 근무 시 전문의 한 명이 맡아야 할 정도로 인력난이 극심하다.
경기 남부 대표적 권역응급의료센터인 아주대병원 응급실은 당초 14명이 근무하던 응급의학과 전문의 중 3명이 의정갈등 와중에 사직했고 최근 추가로 4명이 사표를 썼다.
건국대 충주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사 7명 전원도 최근 사직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 순천향대천안병원, 단국대병원, 국립중앙의료원, 세종충남대병원, 속초의료원 등도 응급실을 일시적으로 닫거나 제한적으로 운영하는 등 응급의료 공백은 날로 확대되는 모습이다.
현장은 ‘절규’, 정부는 ‘여유’
정부 관심사는 응급실 기능 아닌 가동률
특히 심각한 문제는 중증 응급환자 생명을 사수해야 하는 ‘최상위 응급실’인 권역응급의료센터의 기능 마비다.
21일 기준 전국 44개 권역응급의료센터 중 70%가 넘는 31곳의 응급의학과 전문의 수가 12명 미만으로 집계됐다. 남은 의료진이 4명 밖에 없는 병원들도 있었다.
365일 24시간 응급실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한 근무조에 2명 이상, 최소 12명의 응급의학과 의사가 있어야 하지만 대부분의 대학병원들은 이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부는 ‘응급의료 대란’을 부정했다. 특히 대다수 병원들이 문을 닫는 추석 연휴기간 의료공백에 대한 우려 진화에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복지부는 다가올 추석연휴에 응급실로 환자가 몰리는 상황에 대비해 9월 11일부터 25일까지 약 2주간을 ‘추석명절 비상응급 대응주간’으로 지정했다.
특히 국민들의 의료이용 불편함을 최소화 하겠다며 평소(3600개소) 보다 많은 4000개소 이상의 당직 병·의원을 운영하고, 비상진료 체계를 운영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복지부와 지자체는 전국 병원들에 추석연휴 동안 응급실 운영을 독려하고 나섰다.
한 대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지자체가 주도한 간담회에 참석했더니 공무원이 무조건 응급실 불이라도 켜 놓고 있어달라고 읍소했다”고 전했다.
이어 “지금 정부에게 필요한 건 환자를 살리는 응급실 기능이 아닌 국민의 눈을 가리기 위한 응급실 가동률인 것 같다”고 일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