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제시한 의과대학 증원 근거자료에 의료계는 아연실색했다.
2000명 산출 과정과 토론 내용을 기대했지만 대다수는 보도자료였고, 2000명이 언급된 회의는 '제2 서남의대'를 지적한 우려에도 확정 발표된 것으로 드러났다.
의료계가 정부 자료를 조목조목 분석, 반박해 법원에 제출한 3편의 보고서는 실망을 넘어 분노에 찬 분위기였다.
의대 정원 증원‧배분 처분에 대한 집행정지를 신청한 의료계 측은 지난 5월 13일 '의사 수 1만5000명 부족 근거자료의 비판적 분석 보고서'를 14일 서울고등법원에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 대한의학회, 한국보건정보통계학회 등 약 20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과학성검증위원회'가 지난 10일 정부가 법원에 제출한 근거자료를 분석해 작성했다.
김창수 전의교협 회장은 "자료를 검증하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수 천장의 근거자료가 있다는 정부 주장은 기존 보고서 3개를 인용한 수준"이었다며 3개 주제로 나눠 정부 주장을 반박했다.
정부 3대 보고서 가정은 '비현실적'
"2000명이라는 숫자를 도출한 근거를 설명하라"는 법원 요청에 정부는 가장 먼저 서울대, 한국보건사회연구원, 한국개발연구원(KDI) 등 3곳 연구진이 각각 작성한 보고서를 제시했다.
정부는 미래 의사 수 부족을 전망한 이들 보고서를 통해 "객관적‧과학적 근거에 기초한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종일 서울의대 교수협의회장은 "3개 보고서는 경제적 요소 및 닥터쇼핑, 의사 근무일수, 생산성 등 요소들을 정확하게 다루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의사들의 실제 평균 근무일수가 289.5일로 조사된 데 반해 3개 중 2개 연구는 265일로 가정했고, 의료기술 발전으로 의사 1인당 업무량이 매년 3.2% 증가하는 점을 반영하지 않은 것도 문제 삼았다.
더불어 3개 보고서 저자들이 직‧간접적으로 정부와 관련된 인물로서 제3자의 공정한 보고서라고 보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김종일 회장은 "담배 회사 의뢰를 받고 '담배는 해롭지 않다'라는 결과를 발표했다면, 설사 과학적 사실이라고 해도 조심히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경계했다.
현재 의사 부족분을 5000명으로 분석한 보고서에 대해서도 검증위원회는 "의사 수 부족이 아닌 지역별 차이와 수도권 집중화를 부각한 보고서"라고 주장했다.
해당 보고서는 지난 2022년 건강보험 진료비 실적을 기준으로 전국 70개 진료권을 상위와 하위로 나눈 뒤 평균 수준으로 맞추기 위한 의사 수를 추계했다.
이에 검증위원회는 "한국 의사 수가 100만명이라도 지역별 차이는 나타난다"며 "활동의사가 서울을 중심으로 증가하는 문제는 의사 수 문제가 아닌 수도권 집중화 현상"이라고 반박했다.
또 정부는 "현실적 교육 여건을 고려해 의대 정원 확충방안을 마련했다"고 주장했으나 검증위원회는 현재 여건상 당장 2025년과 2026년은 교육이 불가능하다고 맞받아쳤다.
일례로 부산대는 현재 정원 125명에 맞춰 모든 교육시설이 맞춰져 있으나, 내년에 75명이 증원되면 물리적으로 교육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과다인원으로 안전사고 위험이 높다는 것이다.
더불어 교수인력이 갑자기 늘어날 수 없고, 교육이 질(質)이 현저히 저하되며, 이로 인해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평가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폐과(廢科)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증원‧배정 과정은 절차적‧실체적으로 위법
정부 제출 자료 중에서도 보건의료정책심의원회(이하 보정심) 회의록에 가장 이목이 집중됐다.
그간 정부는 의대 증원에 대해 보정심과 산하 의사인력전문위원회, 의료현안협의체에서 논의했다고 거듭한 가운데, 2000명 산출 근거도 이들 회의에서 비롯됐을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 공개된 보정심 회의록에도 그 답은 없었다. 오히려 지난 2월 6일 정부의 의대 증원 규모 발표를 1시간 앞두고 진행된 회의에서 2000명이 처음 언급됐다는 점에서 논란이 불거졌다.
더욱이 당시 보정심 회의에서 2000명 증원에 대한 반발도 거셌던 것으로 드러났다.
A위원은 이 회의에서 "폐교된 서남의대를 20개 이상 만드는 것과 같은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며 "결국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의사들을 양산해서 국민 건강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어 "이에 더해 10년 이상 우리나라 입시 및 과학기술계의 극심한 혼란이 일고, 고등학생이나 재수생들의 의대 쏠림은 더욱 심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검증위원회는 "2000명이란 숫자를 처음 들은 일부 위원들이 경악하는 반응을 보였다"며 "의료계 등과 다양한 수단으로 적극 소통했다는 정부 주장은 기망"이라고 힐난했다.
이어 "정부, 소비자 단체, 타 직역단체의 압도적인 수적우세로 2000명 증원이 심의를 통과했다. 관치 의료의 정점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꼬집었다.
이 밖에도 의사인력전문위원회와 의료현안협의체 회의록 부재, 9‧4 의정합의 위배, 대학별 의대 정원 수요조사 결과를 과학적 근거로 삼은 점 등을 강하게 비판했다.
검증위원회 관계자는 "의대 증원 규모, 그것도 2000명 증원의 안건 회부는 고사하고 타당성과 실효성을 논의한 회의는 없었다"고 밝혔다.
이어 "수요조사 당시 각 대학에 어떤 규모로 증원을 명령했는지는 대학 본부의 자료공개 거부로 파악할 수 없지만 2000명에 짜맞춘 지시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며 의문을 표명했다.
부실한 수요조사‧현장실사는 부당
정부가 지난해 진행한 대학별 수요조사와 현장실사는 당시에도 여러 논란이 일었다.
이를 의식한 정부는 이번 자료 제출과 함께 법원에 낸 '석명 요청에 대한 답변'에서 수요조사와 현장실사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예를 들어 정부 측은 답변서에 수요조사에 대해 "각 대학은 향후의 평가인증 가능성 등을 고려해 현실적인 증원 수요를 제출했다"고 주장했다.
검증위원회는 "의평원 인증을 유지할 수 있는지 협의하는 절차를 밟기에는 불가능한 시간이었다"며 "지난 10월 수요조사의 경우 이틀 만에 대학에 제출하는 경우도 발생했다"고 반박했다.
이어 "향후 투자계획은 교육운영과 물리적 수용 요건에만 집중됐고, 교육과정이나 소프트웨어 부분은 미비한 것을 인지했음에도 정원 증원이 기계적으로 이뤄졌다"고 덧붙였다.
검증위원회는 의학교육점검반의 현장실사 역시 "요식행위 수준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이번 자료 제출을 통해 "국립대, 소규모대, 증원 수요가 큰 대학 등의 기준으로 14개 대학을 선정해 현장실사를 진행했다"고 밝힌 부분도 반박했다.
검증위원회는 "17개 소규모 대학에서 2~3배 이르는 정원을 배정했으나 현장실사는 일부 소규모 대학에서만 시행됐다"고 지적했다.
또 검증위원회가 파악한 29개 대학 중 11개 대학에서 현장실사가 이뤄진 가운데 3시간 동안 점검을 받은 대학은 한 곳에 불과했다.
검증위원회는 "대부분 대학에는 2~3명의 복지부 실무자와 교수 1명 또는 연구원 1~2명이 참여했고, 대략 1~2시간 만에 종료된 형식적인 점검이었다"고 전했다.
정원이 확대된 32개 의대가 현재 의평원의 평가항목을 적용해 자체 평가한 결과 7명이 증원된 연세대 분교와 인제대를 제외한 30개 의대가 의평원 인증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검증위원회는 "과연 어떤 평가 보고서를 근거로 각 대학별 수용 가능 역량을 판단하고 최종적으로 정원 증원을 결정했는지에 대한 자료가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