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송
권은중 차장(한겨레신문 경제부)
2014.04.14 22:00 댓글쓰기

나이가 들수록 나무가 좋아진다. 아니 나무를 갈망한다. 


내가 나무에서 사람이 태어났다고 믿는 유럽의 켈트족이나 노르만족 사람들도 아닌데 나무에 꽂히게 된 것은 다 겨울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겨울이란 계절이 점점 겨루기 힘든 상대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겨울이 끝날 무렵 싹을 터뜨리는 나무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이다.


선조들이 왜 가장 꽃망울을 터뜨리는 매화를 예찬했는지 알게 됐다.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인 퇴계 이황이 유언으로  “매화나무에 물 줘라”라는 선승같은 말을 남긴 것도 수긍하게 됐다.


추위가 사람에게 어떤 악영향을 주는지는 통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2012년 2월 사망자는 2만5000명으로 전년 동월대비 19.6%가 증가했다. 전쟁이 나거나 전염병이 돈 것도 아닌데 한달 사망자가 20%씩이나 뛰어오르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 해 2월 사망자가 2012년 사망자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9.0%로 그전 5년 간(2007~2011년) 평균(8.0%)보다 1.0%포인트가 높았다.


 2011년 12월말부터 영하 15도 이하까지 떨어진 이후 맹추위는 해가 바뀐 2012년 2월에도 풀리지 않았다. 심지어 4월까지도 영하로 뚝뚝 떨어졌다. 몇 달 동안 영하 10도 이하의 추위가 이어지면서 65살 이상의 노인들이 많이 돌아가신 것이다.


2012년의 사망자 수인 26만7000명은 다음해인 2013년에도 깨지지 않았다. 매년 노령화가 심각해지면서 해가 갈수록 사망자가 조금씩 늘고 있는 추세를 감안할 때 2012년의 사망자 수는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그 해 나도 추위가 삶의 의지를 꺾어버릴 수도 있다는 공포를 피부로 느꼈다. 사실 나는 추위에 약하다. 30대 중반부터 내복을 챙겨 입었고 봄이 와도 벗지 않았다. 나는 이미  겨울에 백기투항한지 오래다. 무엇보다 몸보다 마음이 더 위축되면서 의욕을 잃어버리는 것이 더 큰 어려움이었다.


추위에 대한 공포는 계절에 대한 시각을 바꾸어 놓았다. 스키나 겨울등산 같은 겨울 스포츠를 즐기는 대신 몸을 잔뜩 웅크려가며 겨울을 버텼다. 그 좋다는 온천도 겨울에는 사양이었다.


몸이 웅크려질수록 봄을 즐기는 상춘(賞春)의 묘미에 깊게 빠지게 됐다. 인간이 만든 대부분의 문명에서 봄이 부활을 상징한다는 인류학의 정의를 완벽하게 몸으로 체득하게 된 셈이다.   


매년 봄에 대한 갈망은 커졌고 나무가 사람처럼 보이게 됐다. 나무는 봄의 전령이다. 봄은 나무로 시작해서 나무로 끝난다. 대동강 얼음 녹는 소리나 개구리 우는 소리로 봄을 느끼기에는 확실히 부족함이 있다.


그래서일까? 언론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기사가 섬진강 매화 기사다. 동양의 음양오행에서 봄을 상징하는 한자는 목(木)이다. 봄=나무라는 등식이 절묘하다.


나무를 갈망하게 된 것은 봄 탓만은 아니다. 거의 매주 주말 나는 서울 성북구 성북동의 길상사를 다녀온다.
길상사는 양반 출신이지만 가난 때문에 기생이 됐던 김영한 선생이 자신이 운영하던 요정 대원각을 1997년 <무소유>란 책으로 널리 알려진 법정스님에게 시주하면서 문을 열게 된 절이다. 시주 당시 부동산의 가치가 1000억원에 이른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김영한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천재 시인으로 불리던 백석과 사귀었지만 당시 일본유학을 다녀와 기자를 하던 지식인 백석 집안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기생의 삶을 살았다.


그때 사랑을 이루지 못한 백석이 쓴 시가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다. 길상사에는 이런 애틋한 사연과 함께 시내에서 가까워 자주 가게 된다.


지난 주말 3월초였지만 매서운 추위 때문에 나무에서 봄을 느끼기는 무리였다. 대신 나무의 다른 면모를 알게 됐다. 길상사의 대웅전 노릇을 하는 극락전의 오른쪽에 있는 잘생긴 느티나무가 생각과 달리 수령이 60살밖에 안됐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묵직한 덩치 덕에 나는 이 나무가 족히 100년은 됐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무 수령이 60년이라는 표지판을 지난주에서야 봤다.


느티나무는 참으로 잘 생긴 나무다. 위로만 쭉쭉 자라는 미루나무나 소나무와 달리 꼿꼿한 몸체에 옆으로 풍성한 가지가 자란다. 여름에는 거대한 성채처럼 보는 이를 압도한다. 그래서 느티나무는 마을 입구의 정자나무로 적격이다. 


올해 초 어머니가 당신이 늘 볼 수 있게 몇권의 앨범을 단 한권으로 정리하면서 추리고 남은 제법 많은 사진을 내게 보내셨다. 내 돌사진과 초등학교 사진 그리고 대학 졸업사진 등이 있었다.


사진 따위는 거의 정리하지 않던 나는 내 대학사진을 보고 많이 놀랐다. 거기에는 자외선에 노출된 검은 반점 잔뜩 생긴 지금의 나와 전혀 다른 해사한 청년이 서 있었다.


30대 초반부터는 나이를 세지 않았다. 일부러 세지 않은 것이 아니라 셀 시간이 없었다. 그때는 주말도 명절도 없었다. 늘 바빴고 쉴 때는 잠을 자거나 운동을 해야 했다. 처음에는 건강하려고 했지만 어느 순간 살아남기 위해 해야 했다.


텔레비전 따위를 보는 것은 사치였다. ‘대장금’이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후손쯤 된다고 짐작하고 아는 척을 했다가 망신을 사기도 했다. 대부분 우리 또래들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그렇지만 나보다 20살 더 먹은 60살 수령의 길상사 느티나무 앞에서 한숨이 나왔다. 60이어도 하늘을 덮고 있는 왕성한 생명력이 죽비가 돼 내 어깨를 때렸다.


나무는 여름이면 짙은 녹음으로 길상사를 찾은 사람들에게 각각의 화두를 던질 것이다. 매년 그렇게 덕행을 쌓고 있는 느티나무에 질투심이 생긴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나무가 나와 동갑내기가 아니란 점이다. 나와 동갑인 40언저리인데도 저렇게 늠름했다면 난 절망했을지도 모른다.


인생 40세는 불혹(不惑)이라고 한다. 어떤 것에도 혹하지 않고 자기 길을 간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줏대없이 오늘도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린다. 나이가 들면 지혜로워진다는데 단순해진다는 말의 우회적 표현인 듯싶다.


신체적으로도 나을 게 없다. 40이 넘어 얼굴에 검은 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눈도 침침하고 무릎도 쑤신다. ‘청춘’ ‘사랑’이라는 단어 자체가 성가시다. 40이면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말을 만든 작자의 40대 얼굴은 어떻게 일그러졌는지 한번 보고 싶다.


사람의 인생을 아침-점심-저녁에 빗대 유년-청년-노년으로 구분한다.
비유대로라면 나의 시계는 아마 하루의 정점이 지난 오후 4시쯤일 것이다. 오후 4시 나는 해지는 빈 방에 찬밥처럼 남겨진 듯하다. 남은 7~8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20년 뒤인 60대에 나는 지금과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앞으로 20년 동안 나는 저 느티나무처럼 눕지도 자지도 않는 장좌불와(長坐不臥) 수행을 할 수 없으니 쉬이 깨달음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겨울이 끝나는 44살의 봄, 60년을 송곳처럼 대지에 꽂혀있는 한 나무에게서 화두 하나 받은 것만으로 만족한다.


20년 뒤 겨울에서 봄쯤 나는 지금 나무의 나이인 60이 된다. 그러면 나무는 80살. 천년을 버티는 생명력을 가진 이 나무는 여든이 돼 나에게 무슨 화두를 던질까?


두툼한 내복으로 앙상한 팔다리를 겨우 감춘 나는 그래도 눈빛만은 형형한 늙은이가 돼 그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그와 마주한 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허름한 주점에 앉아 소매를 걷어붙이고 소주 한잔 마시고 싶어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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