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력(死力)을 다했다’는 표현이 제격이겠다. 의사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현실에 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사상초유의 수술실 CCTV 설치 의무화’. 되돌릴 수 없는,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을 직시하고 충격파 최소화를 위해 매달렸다. 하위법령 마련은 물론 설치비용 지원 등 후속작업이 산적했다. 특히 회원병원들의 살림살이를 살펴야 하는 대한병원협회 경영위원장인 만큼 일선 병원들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백방으로 뛰었다. 간절한 읍소가 통했을까. 요지부동이던 국회가 설치비용 예산안을 대폭 상향 조정했다. 지원 대상도 전체 의료기관을 확대했다. 하지만 딱 상임위원회까지였다. 예산권을 쥐고 있는 기획재정부가 막판 제동을 걸면서 수 개월의 노력은 물거품이 됐다. 대한병원협회 라기혁 경영위원장(홍익병원장)은 울분을 토하며 최후 수단인 ‘법적 대응’ 가능성을 시사했다.
CCTV 설치비 지원, 묻지마 역차별 분통
지난 2021년 9월 의료법 개정에 따라 일선 의료기관의 수술실 CCTV 설치가 의무화 됐다.
2년의 유예기간이 종료되는 오는 9월 25일부터 전신마취 등 환자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수술을 시행하는 모든 의료기관 수술실에 CCTV를 설치해야 한다.
정부의 의료계는 본격적인 법 시행 1년 여를 앞두고 하위법령 제정과 설치비용 지원 등을 논의하기 위한 협의체를 가동했다.
대한병원협회 라기혁 경영위원장은 병원계를 대표해 이 협의체에 참여했다. 수 개월의 논의가 이뤄지는 동안 그는 회원병원들의 부담 완화에 모든 초점을 맞췄다.
특히 보건복지부가 수술실 CCTV 설치비 지원대상을 병원급 이하 의료기관 1436곳으로 제한하고, 37억7000만원이라는 짜디 짠 예산을 책정한 이후 생업을 포기하다 시피하고 매달렸다.
수술의 절대 비중을 차지하는 종합병원이나 상급종합병원을 설치비 지원대상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납득이 어려웠다. 무엇보다 형평성 차원에서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
라기혁 위원장은 지난 연말 국회 문턱이 닳도록 여의도를 찾았다. 국회의원들을 만나 문제점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수술실 CCTV 설치가 환자안전을 위해 법적 의무사항으로 전환된 만큼 일부 종별에만 설치비용을 지원하는 것은 형평성에 위배된다며 예산안 개정을 요청했다.
절절한 읍소에 국회도 공감했다. 상임위원회인 보건복지위원회는 수술실 CCTV 설치비 지원 대상을 전체 의료기관으로 확대키로 하고, 관련 예산도 99억8000만원으로 증액키로 했다.
물론 병원급 이상 예상 설치비용이 538억6500만원에 달하는 만큼 그 절반인 269억3200만원의 예산을 희망했던 것 보다는 적지만 형평성 문제가 일단락 된 만큼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다음 관문인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기획재정부가 증액에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상임위 의견이 반영되지 못했다.
이에 따라 당초 복지부 계획대로 병원급 이하 의료기관 1436개소에 대해서만 수술실 CCTV 설치비용이 지원될 예정이다.
종합병원과 상급종합병원은 자체 경비를 들여 CCTV를 설치해야 한다. 여기에 인건비, 보관비 등 유지 및 관리에 소요되는 비용까지 감안하면 적잖은 비용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다.
라기혁 위원장은 “전체 의료기관으로의 설치비 지원 확대를 기대했지만 너무나 아쉬운 결과”라며 “무엇보다 형평성 차원에서도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이어 “정부는 지원대상 차별에 대해 명확한 논리를 제시하지 못했다”며 “묻지마 역차별에 분통이 터진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필수의료 핵심 인력인 수술의사들 부족한데 인력난 더 심화시킬 악수(惡手)
라기혁 위원장의 울분에는 설치비 지원 역차별 외에도 수술실 CCTV가 초래할 여러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섞여 있다.
현재도 임상현장에는 필수의료 핵심 인력인 수술의사들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수술실 CCTV는 그 인력난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는 지적이다.
실제 대리수술 등으로 입법의 단초를 제공한 성형외과, 정형외과 등은 여전히 전공의 지원율이 고공행진이지만 문제 본질과 무관한 수술 분야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수술실 CCTV는 젊은의사들의 외과, 흉부외과, 산부인과 등 필수의료 분야 지원 의지를 떨어뜨릴 게 자명하다는 우려다.
라기혁 위원장은 “수술실 CCTV 설치법 통과 이후 젊은의사들 사이에 수술에 부담을 느껴 관련 분야 지원을 꺼리는 분위기가 확연하다”고 말했다.
이어 “기존 의사들 역시 의료사고 및 분쟁에 대비해 최소한의 방어적 수술만 할 수 밖에 없고, 이는 결국 환자 생존율과 회복률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근 국회에서 급물살을 타고 있는 의사면허법과 관련해서도 수술실 CCTV 데이터 유출 등으로 인한 불이익을 병원장이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는 점도 우려했다.
CCTV 분쟁은 결국 원장 책임, 의사면허 취소도 가능…"법적 대응 검토"
정부는 병원에 CCTV 설치를 의무화 시키고 녹화 및 보관 등 유지 관리 책임까지 전가시킨 상태로, CCTV로 인한 분쟁 발생시 의사면허가 취소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그는 “개인정보보호법 등으로 실형을 받게 되면 병원장은 의사면허가 박탈당하게 된다”며 “이에 대한 정부 고민은 찾아볼 수 없다”고 힐난했다.
이어 “악법도 이런 악법이 없다. 너무 억울하고 처참하다 못해 비참한 심정”이라며 “단계적 시행 등을 수 차례 건의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불가’ 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라기혁 위원장은 결국 최후 수단인 ‘법적 대응’ 카드를 꺼내 들었다. 법의 힘을 빌어 제도의 불편부당에 맞서겠다는 각오다.
그는 “현재로써는 행정소송 등 법적 대응을 검토할 수 밖에 없다”며 “과연 현 상황이 법리적으로 타당한지 충분한 법리 검토를 통해 소송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의사가 잠재적 범죄자 취급받는 현실이 통탄스럽다”며 “진료에만 전념하며 병원을 운영하기에는 너무나 고단한 환경”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