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필수의료 살리기’라는 정부 말에 의사들은 어리둥절했지만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관련 법안은 없고 오히려 의사들을 억압하는 악법들이 이어지면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결국 포기와 분노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의료계를 망가뜨릴 ‘필수의료 패키지’라는 정책은 더 이상 미래가 보이지 않을 지경에 다달았다.
"의사집단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고 있는 정부"
돌이켜 보면 정부 입장에서는 지난 2020년 4대 악법 기습통과 시도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국민 선동 차원에서 의사집단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필수의료 위기’가 필요했던 것이고, 앞에서는 필수의료 살리기로 포장하면서 뒤로는 비급여 억제 및 원격진료 추진, 검사수가 인하 등 논란이 됐던 정책들을 슬쩍 통과시켰다.
이는 지금까지 정책 실패는 반대한 이익집단인 의사들 탓으로 돌려서 일거양득을 꾀한 게 아닌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가장 먼저 ‘필수의료’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전 세계 어디에도 필수의료라는 말은 없다. 대체 무엇이 필수의료인지 의료계 논란이 가중됐다. 결국 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살려야 한다고 대대적인 홍보를 이어왔다.
‘필수의료 위기’를 정의해야 하는데 ‘응급실 뺑뺑이 사건’이 발생하고, ‘소아청소년과 오픈런’ 사태도 연일 언론에 오르내린다.
기회를 잡은 정부는 이 두 가지를 ‘필수의료 위기’라 정의하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홍보한다.
그러나 이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고 결국 최종적으로 유일한 해결책이라며 의과대학 입학정원 2000명 증원이라는 정책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과거에 이른 바 ‘응급실 뺑뺑이’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응급실 환자들은 치료 가능한 병원을 찾기 위해 밤새 전화로 수용 여부를 문의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던 것이 119 구급대 이송 전 수용 가능 여부 확인이라는 법률조항과 만나서 병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여기 저기를 헤매게 된 것이다.
단지 과거에는 응급실에서 ‘병원 뺑뺑이’를 했다면, 이제는 구급차에서 ‘응급실 뺑뺑이”라고 바꿔부르는 것 뿐이지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
"소위 뺑뺑이 사안도 병원 간 이송체계 병목현상 기반, 해법은 선(先) 상급병원 인프라 확보"
가장 큰 원인은 병원 간 이송체계 병목 현상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급병원의 최종치료 인프라가 여유롭게 확보돼야 한다.
그 전제조건은 과밀화 해소다. ‘소아과 오픈런’은 진료를 위한 대기줄이 길다는 뜻으로 쓴 말인데, 정부는 국민 편익을 위해 반드시 이 대기줄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비보험 없이 소청과 의원이 최소한 유지하려면 최소 하루 80~100명 이상 진료를 해야 하기에 특정 시간대에는 줄을 설 수 밖에 없다.
오픈런 없는 소청과 의원은 폐업할 수 밖에 없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대학병원의 긴 예약 대기시간과 ‘1분 진료’는 의료계 압박과 비용증가 억제에 써먹어 왔지만 이제는 별 효과가 없었다고 판단했는지 이제는 ‘필수의료 위기’라며 사용하지 않고 있다.
"2000명 증원은 10년 전부터 준비했어야 하고 정부 강제명령 남발은 젊은의사들 공분 초래"
정부가 주장하는 ‘필수의료 위기’는 오래 전부터 의료현장 전문가들이 주장했으나 정부에서 방관했던 문제들이다.
2000명이라는 예상을 뒤엎은 의대정원 증가 숫자는 복지부 실무자들도 대부분 발표 당일 알게 됐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실제로 장관 및 차관도 2월 초까지 확정된 게 없다고 했다.
만약 이 정도 증원을 처음부터 생각했다면 최소 10년 전부터 준비를 하는 게 마땅하지만 정부는 이전까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물리적인 강의실이야 어떻게 늘린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학생이 60% 늘려면 교수도 60% 늘어야 하는데 교수 양성에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면 단기간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인체 해부 실습은 지금까지 10명이 1조로 실습한다면 앞으로는 16명이 해야 한다. 질 저하도 없고 2~3개월 안에 준비도 가능하다는 복지부의 설명은 납득이 어렵다.
의사들과 공무원의 의대 증원 근거에 대한 논란을 생각해보면 이 두 집단이 서로에 대해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정부의 무리한 정책에 묵묵히 따르지 않는 의료계 결정을 강제로 진압하려는 과정에서 상호 감정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처음부터 의료계가 극한투쟁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명절 직전 기습적으로 군사작전 하듯 발표한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정당한 항의를 과격행동 취급하며 협박했다.
사직서 제출 및 수리금지, 단체행동 교사금지 명령까지 복지부 권한 범위가 의심스러운 강제명령들을 남발하면서 젊은의사들의 마지막 남은 참을성마저 거두게 됐다.
정말로 아쉬운 점은 최소한 의료계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함께 하고자 했다면 이러한 파국까지 이어지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의료계는 절대 파국을 원하지 않는다. 전공의, 전문의들이 사직서를 내고 거리에서 부르짖고 있는 이유는 어떻게든 의료계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지 의료계를 망가뜨리기 위함이 아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정부의 정책 폭주에 가장 먼저 피해를 입는 것은 아무 죄가 없는 전공의와 의대생들이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함에 있어 원칙이 있다. 만성질환은 오랜 치료기간이 필요하다. 이른 바 정부가 말하는 필수의료 위기는 오랜 기간 누적된 결과이며 절대로 단기간 해결이 불가하다.
"의사들을 믿지 못할 나쁜 집단으로 만들어 이익 얻으려는 시도는 중단돼야"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런 필수의료 문제를 자기들이 단기에 해결하겠다고 저마다 무리한 정책을 추진한다면 해결은 고사하고 문제들을 양산하며 의료계 왜곡만 더욱 심해질 것이다.
환자와 의사는 믿음의 계약으로 의료행위가 이뤄진다. 이들을 갈라치기해 선거에서 승리하겠다는 얄팍한 시도는 결국 국민들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의사들을 믿지 못할 나쁜 집단으로 만들어 이익을 얻으려는 시도는 중단돼야 한다. 결국 그에 따른 모든 피해는 국민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정부는 정치적 계산이 아닌 진정 국민들을 위한 백년지대계 의료정책을 의료계와 함께 만들어가야 하고, 그 시작은 서로에 대한 존중과 이해다.
필수의료가 아직도 뭔지 모르겠지만 의료를 진정으로 살리고 싶다면, 적절한 대책부터 함께 논의하자.
강압적 협박으로 의료계를 굴복시켜 설령 정부가 이긴다고 한들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문성을 존중하고 동반자 입장으로 처음부터 논의를 촉구한다.
지금껏 매번 정부 정책은 현장을 무시한 탁상공론으로 비판 받아왔다. 이러한 비합리성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한다면 우리나라 미래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