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디 임수민·구교윤 기자/기획 2] 전국 수련병원들 최대 관심사인 전공의 모집 시즌이 도래했다. 전공의 모집 결과는 한 해 인력농사의 흥망을 좌지우지할 뿐 아니라 병원 자존심이 걸린 주요 지표로 활용되기 때문에 수련병원들은 벌써부터 예비 전공의들을 향한 구애작전이 한창이다. 코로나19로 본격화된 온라인 설명회부터 별정수당, 해외연수 지원은 물론 병원계 공공연한 비밀인 '어레인지(Arrange)' 등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전공의 모시기에 나서는 모습이다. 특히 올해는 대형병원 간호사 사망 사건으로 촉발된 전례 없던 대대적인 필수의료 살리기 지원책이 예비 전공의들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또한 코로나19 팬데믹을 넘어 엔데믹에 안착한 상황 속 인기과 판도 변화와 대한전공의협의회가 사활을 걸고 추진 중인 ‘36시간 근무제’ 실현 여부 등이 의료계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2023 전공의 모집을 앞두고 올해 의료계를 시끄럽게 했던 이슈들이 전공의 모집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데일리메디가 6회 연속 기획으로 전한다. [편집자주]
① “한 명도 귀하다” 전공의 모집 사활 건 수련병원
② 전공의 '짬짜미 채용' 어레인지 옛말…공정문화 정착
③ 전공의↔수련병원 ‘36시간 연속근무’ 시각차 확연
④ 침울한 내외산소…"필수의료 관심과 전공의 별개"
⑤ 필수의료 도화선 신경외과 '전공의 수급' 주목
⑥ 코로나19 판데믹 넘은 ‘엔데믹’…변화하는 인기과 판도
한 때 수련병원들 사이에 공공연한 관행으로 여겨지며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킨 전공의 ‘어레인지(Arrange)’가 옛말이 돼가는 모양새다.
의료계에 ‘공정’을 주요 키워드로 여기는 MZ세대 유입이 늘며, 전공의들 관심이 높은 대형병원 및 인기과를 중심으로 어레인지 관행을 지양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어레인지’ 관행은 전공의가 수련할 병원 및 과에 지원할 때, 특정 전문과에서 사전에 임의로 내정자를 정해두고 선발하는 행태를 말한다.
이는 전공의 모집이 1년에 한 번 진행되는 만큼 탈락자가 1년 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불합격 가능성이 큰 지원자들이 다른 과에 지원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차원에서 시작됐다.
소수의 기회가 박탈되는 측면이 있으나, 다수의 수련병원과 인턴이 겪게 될 ‘리스크(risk)’를 최소화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부작용보다 이익이 더욱 크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공정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수련병원과 구성원이 미리 짜고 맞추는 선발 방식은 일부 지원자의 기회를 애초에 박탈·제한하는 등의 심각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순혈주의 선호 문화와 일부 교수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가족‧친지를 인기과에 내정하는 사례가 늘면서 수련병원계의 불공정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 2020년 전공의 모집을 앞두고 서울 소재 한 대학병원 불공정 채용 의혹이 불거져 곤혹을 치른 바 있다.
사건의 발단은 원내에 ‘P과 B교수의 불의(不義)에 대해’라는 제하의 대자보가 붙으며 시작됐다.
해당 대학병원 교수가 자신의 자녀를 인기과에 경쟁 없이 ‘무혈입성’시키기 위해 다른 인턴들이 함께 지원하지 못하도록 강요했다는 내용이다.
대자보에는 “26년 혹은 그 이상의 인생을 공부에 투자한 수재들이 인생을 건 경쟁을 벌이는 현장에서 부정과 불의가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사랑하는 모교, 병원, 그곳에서 수련받는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나고 있다”며 어레인지 관행을 꼬집었다.
MZ세대 ‘어레인지’ 용납 불가…고소‧대자보‧제보 등 적극 조치
사회 전반적으로 ‘공정’이라는 가치가 중요시되며 이러한 불공정 관행도 점차 사라지는 추세다.
의정부성모병원 비뇨의학과 A교수는 “과거에는 평판 등을 따져 전공의 모집 전에 내정자를 두는 문화가 분명 있었지만 최근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인기과는 더더욱 엄격하게 진행하기 때문에 어레인지가 불가능하다”며 “지원하는 대로 받고 성적에 따라 합격자를 선정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선발 비리가 드러나면 전공의들이 고소하거나 제보하는 등 바로 조치를 취해 예전과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며 “위험을 감수하고 어레인지를 감행하는 진료과는 없다”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기피과는 조금 다른 입장이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전공의를 확보하기 위해 합격을 보장해가며 지원을 독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A 교수는 “과거에는 군대를 피하기 위해 정원이 여유 있는 과로 지원을 바꾸기도 했는데 요즘 친구들은 그렇지 않다”고 토로했다.
이어 “진료과별로 수익 차등이 몇십 배 이상 발생하고 전공의들도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불합격을 감안하고도 도전하는 분위기”라고 덧붙였다.
B 교수는 “원하는 과가 아니면 1년 후 재도전하겠다는 성향이 강해 비인기과들은 애가 탈 수밖에 없다”며 “인력 한 명이 소중한 기피과에는 어레인지 문화가 남아있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순혈주의에 대해서는 많은 개선이 이뤄지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C교수는 “자교출신 우대를 없다고 할 순 없지만 과거에 비해 많이 사라지는 추세”라며 “순혈주의보다는 오히려 원내에서 인턴을 경험한 친구를 조금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D교수 역시 “순혈주의 어레인지 문화가 아직 남아있긴 하지만 과거에 비해 많이 사라지는 추세인 건 맞다”며 “특히 규모가 큰 병원일수록 내부 반발을 우려해 조심스러워한다”고 전했다.
하지만 선후배 관계가 중요한 소규모 병원 등에서는 여전히 암암리에 진행되고 있다.
E교수는 “전공의는 1년을 포기하고 싶지 않고, 교수는 원하는 인재를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완전한 근절은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규모가 작은 병원일수록 여전히 어레인지 제도를 진행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인기과 역시 겉으로는 없다해도 내부적으로는 잔존할 것이라 예상된다”고 덧붙였다.
대전협 “불공정 채용 척결 노력”
대한전공의협의회 역시 어레인지 관행의 불공정성을 지적하며 척결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강민구 대한전공의협의회장은 “아직 어레인지 관행이 100%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 비해 실력주의로 평가되며 공정성이 많이 담보되고 있다”며 “긍정적인 변화”라고 말했다.
대전협은 전공의 채용과정에서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 현재 대한의학회가 착수한 인턴수련교과과정 명확화 및 평가 표준화 작업 연구용역에 조승원 부회장이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또한 매년 전공의 실태조사 등을 통해 불공정 채용 실태파악 및 조사에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어레인지 문화는 병원 내부적으로 암암리에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내부자 제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다.
강민구 회장은 “전수조사에는 여러 문제가 따르는 만큼 병원 구성원이 얘기하지 않으면 파악할 수 없다”며 “적극적으로 내부고발자에 대한 익명성 보장에 힘쓰고 있다. 불공정 채용을 겪거나 목격한 회원들은 우리 사회의 선진적 문화 구축을 위해 적극 제보해 달라”고 당부했다.
대전협의 어레인지 관행 제동은 수 년 전부터 이어져 왔다.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지난 2020년 수련병원의 공정한 선발을 촉구하며, 선발과정에서 발생하는 차별에 강력 대응하겠다고 천명했다.
당시 대전협은 “인턴 선발 과정에서 여전히 존재하는 군복무, 지역, 성별 등에 대한 차별에 걱정과 우려가 앞선다”며 "민원, 제보 등에 적극 대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의료계에 만연해 있는 전공의 불공정 선발 척결을 위한 인식 개선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지난 2012년 서울 소재 대학병원 인턴들이 전공의 선발과정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서자 이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대전협은 "병원이 임의로 마음에 드는 전공의를 내정한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라며 "부당대우를 받은 당사자들은 혹시나 불이익이 있을까 봐 쉬쉬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교수가 선발을 약속했다가 파기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피해자가 발생하자 보도자료와 입장문을 배포하는 등 인식 개선을 위한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