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2월 20일 전공의 집단사직 후 의료공백이 길어지면서 해외의사 국내 진료를 허용하는 조치를 정부가 입법예고했다. 의료계는 의료 질(質) 저하 등을 우려하며 반발하고 있지만 현재의 의료공백을 메우기 위해 다음 단계를 생각, 수용해야 한다는 일부 반대 의견도 제기된다. 이 과정에서 공정성 논란이 불거졌던 해외의대 졸업자에 대한 국내 면허취득 기준 완화도 거론되며 논란에 불을 지폈다. 데일리메디가 해외의사 국내 진료 허용을 둘러싼 배경과 의료계 반응 등을 정리했다. [편집자주]
정부는 금년 5월 8일 ‘의료법 시행규칙 일부개정령안’을 입법예고하고 20일까지 의견 수렴을 거쳤다. 이는 전공의 이탈 및 의대 교수들의 사·휴직으로 인한 의료공백을 메우기 위한 조치다.
보건복지부는 “보건의료 재난위기 상황에서 의료공백 대응을 위해 외국 의료인 면허를 가진 자가 승인을 받아 의료서비스를 제공토록 해 국민 건강과 생명을 보호하겠다”고 개정 취지를 밝혔다.
개정안에는 외국 의료인 면허를 가진 자가 복지부 장관 승인을 받아 의료행위를 할 수 있는 업무가 추가됐다.
정부는 올해 2월 ‘의사 집단행동 중앙사고수습본부(중수본)’를 즉각 운영하고 위기단계 ‘경계’를 발령했다. 같은달 의대증원에 반발한 전공의들이 집단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위기단계를 최고단계인 ‘심각’으로 격상했다.
이에 추가되는 의료법 시행규칙 제18조(외국면허 소지자 의료행위)에는 보건의료와 관련해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제38조제2항에 따른 심각 단계 위기경보가 발령된 경우로서 ‘환자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복지부장관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의료업무’가 포함됐다.
의료계 “외국 의사보다 외국 공무원 수입 시급” 반발
정부의 이 같은 조치에 의료계는 즉각 반발했다. 보복성으로 시행되는 각종 규제 완화책에 대해 우려를 표한 것이다. “외국 의사보다 외국 공무원 수입이 더 시급하다”는 말까지 나올정도였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외국 의사 수입은 집단사직에 대한 보복성 조치”라며 “이번엔 전세기를 보내는 대신 외국의사를 수입하는 것으로 정책을 전환했나”라며 비꼬았다.
경북의사회는 “이번 정책으로 외국 의대를 졸업했지만 한국 의사 국시를 통과하지 못한 이들도 현장에서 일할 수 있게 된다”고 우려했다.
대학병원 교수들도 공분했다.
서울 소재 대학병원 A교수는 “외국의사를 수입하겠다는 복지부를 보며 모멸감을 느꼈다”며 “지금까지 참아왔지만 이제는 무엇을 위해 날 혹사시켜야 하는지 모르겠다. 의사를 수입하면 되지 않나”라며 꼬집었다.
경기 소재 대학병원 B교수도 “남아서 진료를 보고 있는 입장에서 외국의사 수입을 거론하는 것을 보니 당혹스러웠다. 의사를 도구로 보고 있다”며 “외국의사 수입은 돈은 많지만 학업 능력이 부족해 해외로 유학한 일명 ‘금수저’들의 일자리 마련을 위한 정책으로 보인다”고 일갈했다.
임현택 의협 회장도 정부를 겨냥해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비판 게시글을 올렸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그는 소말리아 의대 졸업식을 다룬 기사를 첨부하고 ‘Coming Soon’이라고 적었는데, 이는 ‘세계에서 가장 폭력적인 도시 중 한 곳인 소말리아 모가디슈에서 의대생 20명이 졸업장을 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동의하는 댓글도 많았지만, 일부 누리꾼들은 특정 국가 비하 및 인종 차별에 대해 우려하며 지적했고 임 회장은 해당 게시물을 삭제했다.
임 회장은 “수없이 많은 후진국 의사가 아니라 일본에서 후생노동성 장관 하나만 수입해 오는 게 낫겠다”고 일침하기도 했다.
논란이 거세지자 한덕수 국무총리는 진화에 나서기도 했다.
한 총리는 5월 10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를 주재하고 “어떤 경우에도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의사가 우리 국민을 진료하는 일은 없도록 철저한 안전장치를 갖추겠다”고 약속했다.
해외의대 졸업자 의사면허 취득 완화? 정부 “사실 아냐”
이 과정에서 외국의사에게 국내 진료를 허용하는 조치 외에, 정부가 해외의대 졸업자의 국내 의사 면허 취득 완화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도 알려졌다.
복지부는 “사실이 아니다”고 해명했지만, 해외의대 인증기준과 관련해 꾸준히 문제를 제기해온 의료계 단체는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공정한사회를바라는의사들의모임(공의모)는 성명서를 통해 “의사 면허 장사로 논란이 됐던 헝가리의대와 우즈벡의대 졸업생 다수가 면허취득 기회를 얻게 된다”고 우려했다.
이어 “해외의대 졸업생에게 의사 면허 부여 기회를 늘린다는 것은 모든 국민은 자유롭되 금주저들은 편법으로 더욱 자유롭게 하겠다는 말과 같다“고 힐난했다.
국회에서도 해외의대 졸업생의 국내 의사면허 취득 등 성과에 대한 통계를 내놓으며 정부의 의료대란 해결 방식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의사 출신 21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신현영 前 의원(더불어민주당)에 따르면 2005년부터 2023년까지 외국의대 졸업자의 한국의사 예비시험 합격률은 절반에 그쳤다.
최종적으로 국가시험을 통과해 국내 의사면허를 발급받은 비율은 41.4%에 불과했다.
응시자가 10명 이상인 국가의 최종 합격률을 살펴보면, 영국이 69.0%로 가장 높았으며, 파라과이 53.3%, 헝가리 47.9%, 러시아 45.0% 순이었다.
신현영 前 의원은 “환자 뿐 아니라 외국의대 출신 의사에게도 자칫 발생하는 의료사고의 책임을 오롯이 본인이 감당해야 한다. 정부의 법 개정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일침했다.
그러나 의료계 의견이 모두 동일한 것은 아니다. 중증 난치성 뇌전증 환자 수술 중단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해외 마취인력을 수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홍승봉 거점 뇌전증지원병원 협의체 위원장(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은 “중증 난치성 뇌전증 환자 수술이 마취인력 부족으로 취소되거나 무기한 연기되고 있어 환자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며 “마취 전문의에 대한 국내외 비상 협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일부 교수들에 따르면 마취 의사들은 직접 환자 진료를 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어를 잘할 필요도 크지 않아 실현이 가능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설명이다.
홍 위원장은 “한국 의사, 간호사들이 대부분 간단한 영어 대화가 가능하므로 영어 소통이 가능한 외국 마취 의사는 병원 업무에 별 문제가 없을 것 같다”며 “영어를 사용하는 인도, 홍콩, 필리핀 의사뿐 아니라 일본, 중국, 대만 등 의사들도 영어를 비교적 잘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