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디 고재우 기자/
수첩] 싸움은 있었는데 이긴 사람이 없다는 분위기다. 정치권은 의료계와의 합의를 두고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던 공공의료 개혁 동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했고, 의료계에서는 섣부른 합의였다는 비판이 나왔다.
그야말로 승자 없는 전쟁이었다. 지난 8월7일 대한전공의협의회 파업으로부터 시작된 의료계 총파업은 대한의사협회 최대집 회장이 더불어민주당·보건복지부와 합의문에 서명하면서 막을 내렸다.
그때부터 최대집 회장과 집행부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가 시작됐다. 의대 정원 확대 및 신설·공공의대 설립·원격의료·첩약 급여화 시범사업 등 이른바 4대 악(惡) 정책에 대한 ‘철회’가 명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전협 비대위는 강하게 반발했다.
이후 대전협 비대위는 ‘서명한 합의는 돌이킬 수 없다’며 파업 중단을 모색했고, 의협에 대한 반발은 대전협 집행부까지 이어졌다.
‘의료계 총파업 핵심’으로 평가 받던 대전협 박지현 비대위원장이 결국 불명예 퇴진했고,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학생협회 집행부도 4대 악 정책 철회를 주장하며 배수진을 쳤다.
그렇다고 정부와 여당이 의료계와의 힘 싸움에서 승리한 것도 아닌 듯하다. 의료계와의 합의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문재인 정부의 보건의료정책이 사실상 좌초 위기에 빠졌다’는 진단이 나왔다.
의료계 내부의 알력 행사에 문재인 정부가 결국 한 발 물러섰고, 2년 여 남은 대통령 임기 동안 레임덕이 가속화될 것이란 예측까지 제기됐다.
여기서도 문구가 문제였다. 철회 대신 쓰인 ‘원점 재논의’와 ‘일방적 추진을 강행하지 않는다’가 국회 내 협의체 논의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기존 법안보다 후퇴한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있음을 뜻하는데, 이 자체가 문재인 정부의 보건의료정책 실패로 귀결될 것이란 우려다.
간호사 출신인 더불어민주당 이수진 의원은 “이번 합의안은 의대 정원 확대와 공공 의대 신설, 지역의사제 도입을 의사들의 진료 복귀와 맞바꾼 것일 뿐”이라고 일침했다.
이어 “힘을 가진 자들이 국민의 생명을 인질 삼아 불법 집단행동을 할 때 과연 정치는 무엇을 해야 하고 어느 ‘원점’에 서 있어야 하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비판이 커지자 합의 주역인 더불어민주당 한정애 정책위의장은 “백기 투항이라고 제게 문자주시는 분들이 계신다. 동의하지 않는다”며 “의료서비스 지역 불균형 해소, 필수의료 강화, 공공의료 확충의 원칙을 지키며 끈기를 가지고 소통·협의하며 추진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국민의힘(옛 미래통합당) 의원은 “행정수도 이전이나 탈원전 등 여당이 제대로 된 의견 수렴 없이 추진하는 정책이 한둘이냐”며 “이번에는 의료정책에서 탈이 났는데, 다른 곳에서도 탈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고 힐난했다.
정부 여당과 의료계 싸움은 승자 없는 전쟁으로 끝났다. 승자는 없지만 피해자는 여느 때보다 명확하게 나타났다. 국민이다. 어떤 이는 치료 기회를 놓쳐 식물인간이 됐고, 어떤 이는 수술을 제때 받지 못해 소중한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의료계 총파업이 우리 사회에 남긴 교훈은 정치권의 밀어 붙이는 정책과 유력단체의 국민 생명을 담보로 하는 총파업과 이로 인한 피해자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국민이었다는 당연한 사실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