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수술 전공의 파면을 보면서…
2014.12.07 20:00 댓글쓰기

[수첩] '인순고식 구차미봉(因循姑息 苟且彌縫)'. 조선시대 병중에 있던 연암 박지원이 아들 앞에서 붓을 들어 이 여덟 글자를 써 내려갔다.

 

“천하 만사가 이 여덟 자 때문에 잘못된다.” 연암은 평소 이 말을 자주 했는데, 아들 박종채가 아버지의 기억을 기록한 ‘과정록’에 나온다.


인순고식(因循姑息)은 상황을 낙관하고 방심해 하던 대로 일을 계속 하다가 문제를 키우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인순고식이 누적돼 나타난 문제를 정면 돌파하기보다 대충 뭉뚱구려 넘어가는 것이 구차미봉(苟且彌縫)이다.


이를 인용한 이유는 최근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천 K대병원 응급실 전공의의 ‘음주수술’ 역시 이 팔자(八字)의 해석과 맞아떨어진다는 생각 때문이다.


사건 당일인 지난 11월 28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더욱 그렇다. K병원에 따르면 1년차 전공의 A씨는 3년차 선배와 저녁을 먹으면서 반주를 하고 당직실로 복귀했다.


당직실에는 2년차 전공의 선배 B씨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마침 응급실 당직 콜이 울렸고 A씨는 당직근무자였던 B씨를 대신해 응급실로 향했다. 사건은 여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병원은 "A씨가 선배를 대신해 봉합을 하면 칭찬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러나 과연 후배의 그릇된 행동을 보고도 말리지 않은 선배 B씨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는지 의문이다.


A씨 ‘실수’를 막을 수 있는 기회는 또 있었다.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환자나 보호자가 어느 의사가 당직을 서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응급실 내 당직전문의 명단을 게시해야 한다.


경황이 없는 환자 및 보호자는 차치하더라도 다른 의료진은 A씨가 당직 담당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았어야 했다. 아울러 보호자의 증언대로 수술장갑을 끼지 않고 술 냄새가 나는 등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다면 환자 안전을 위해서 응급실 근무자들이 A씨 행위를 제지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K병원의 응급의료시스템은 A씨 실수를 걸러내는 최후의 보루가 되지 못했다. 12년 연속 최우수응급의료기관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한 대목이다.

 

병원은 사태가 일파만파 확산되자 A씨를 파면했고 나아가 응급의료센터 소장, 성형외과 과장 등 관련자 10여명을 보직 해임하는 것으로 사태를 일단락졌다. 병원장 일동은 환자 부모에게 찾아가 사과를 시도했지만 거부당했다.

 

직원 과오에 발빠르게 책임지는 병원의 대처는 높이 살만 하다. 하지만 일부 관련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됐다고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1년차 전공의가 술을 먹고도 응급실로 떠밀려야 했던 수련시스템과 응급의료인력 관리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실제 이번 사태 후 의료계에서는 전공의를 파면한 것에 대해 적지 않은 반발감이 피력됐다. 굳이 책임을 따진다면 전공의가 아닌 병원과 제도 자체에 메스를 들이대야 한다는 것이다.

 

수도권에서 개원 중인 한 원장은 "이번 결과를 보면서 너무 어처구니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비록 음주를 하고 환자를 수술한 것은 잘못됐지만 그렇다고 젊은 의사가 왜곡되고 수년간 누적된 잘못된 의료정책의 희생양이 된 것은 해결 방법으로는 너무도 잘못된 방향"이라고 지적했다.

 

즉, 이 말은 사람만 바뀌는 것은 당장 쉽고 편리한 구차미봉(苟且彌縫)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 차원서 늦었지만 이제라도 유사한 문제가 재발하지 앟으려면 의료시스템 전반의 허점을 면밀히 분석하고 재정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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