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교집합 신분 '전공의'
2015.03.23 18:38 댓글쓰기

키가 160cm가 넘는 A그룹에 초콜릿을 주고, 안경을 쓴 B그룹에 사탕을 준다면 160cm가 넘는 키에 안경을 쓴 사람은 무엇을 받게 될까. 수학 논리상으로는 A와 B에 속하는 교집합의 경우 초콜릿과 사탕을 모두 받을 수 있다.


의료계에서 전공의는 이 같은 교집합 신분에 해당한다. 이들은 피교육자이면서 근로자인 교집합 신분이다. 전공의들은 전문의가 되기 위한 수련을 받으면서도 의료인으로서 병원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피고용인이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전공의들은 근로자와 피교육자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의무를 박탈당하고 있다.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수련의로서 술기를 배우거나 공부할 시간을 충분히 보장받지도 못하는게 현실이다.


이 같은 문제는 그동안 대다수 수련병원들이 전공의를 '피교육자'라고 부르면서도 '값싼 노동력'으로 여겨왔다는 점에 기인한다.


2014년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조사에 따르면 수련시간과 연봉을 단순 계산했을 때 전공의 시급은 5885원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주당 100시간이 넘는 수련시간에도 병원들은 근로기준법에 준하는 임금을 지불하지 않은채 전공의들의 피교육자 신분을 강조해온 것이다.


최근 인천 A 대학병원 내과 파업사태만 봐도 그렇다. 파업이라는 행위의 정당성과 이후 수련병원이 내린 처벌 논란은 차치하고라도 병원이 전공의들을 노동력으로만 여겼다는 점은 명확해 보인다.


당초 배정된 인원보다 적은 수의 전공의들에게 과도한 업무량이 부과되면서 교육 기회가 줄어들었지만 인력충원이 이뤄지지 않자 전공의들이 반발한 것이다.

 

게다가 이 대학병원에서는 전공의 인력 이탈이 있을 경우 그 자리를 PA로 대체하는 내부 방침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공의가 피교육자에 해당한다면 이 같은 인력대체는 모순이다.


A 대학병원뿐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잇따라 발생한 전공의들의 파업에서 대전협은 수련병원이 전공의의 근로자와 피교육자의 이중적 신분을 이용해 노동착취를 하고있다는 비판을 줄곧 제기해왔다.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전공의들은 ‘수련’이라 쓰고 ‘근무’라고 읽는 도에 넘치는 노동력 착취로 정작 제대로 수련 받을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며 "살인적인 업무량과 열악한 수련 환경을 타개할 방안 없이 젊은 의사들의 소신만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 의료계에서 전공의가 '공노예', 펠로우(전임의)가 '사노예'라고 불린다는 사실은 이들이 피교육자 또는 근로자가 아닌 ‘노예’라는 번외의 영역으로 밀려났음을 방증한다.


이에 전공의들은 최근 당직비 소송을 통해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고, 수련의로서 과도한 업무로 인해 보장받지 못하는 교육의 질을 개선해줄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더 이상 근로자로도 피교육자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슬픈 교집합으로 남아있지 않겠다는 외침이다. 대한병원협회는 "의료계 현실과 맞지 않는 방안들"이라며 우려를 표명하고 있지만 더 이상 전공의들 외침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수련병원을 비롯한 의료계와 정부는 뒤틀린 구조를 탓하며 전공의들의 희생만을 강요하기 보다는 이들이 피교육자로서 져야 하는 의무뿐만 아니라 근로자로서 누려야 하는 권리를 모두 찾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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