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대 낮은 정책이 초래하는 의사-환자 불신
2015.04.23 07:23 댓글쓰기

[수첩] 영국 두산밥콕의 앤디헌트 CEO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원전사업을 ‘의료’에 빗대 눈길을 끌었다.

 

그는 “의사에게 진료를 받거나 수술을 맡길 때 환자들이 온전히 믿고 가야하는 것처럼, 원전에 대한 시민의 신뢰 확보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주목할 대목은 그 다음이다.

 

헌트 CEO는 “신뢰를 확보하는 것은 원전 운영사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원전 운영사와 함께 이를 관리, 감독하는 정부 당국이 공동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원전사업이 순항하기 위해서는 ‘신뢰 확보’가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운영사뿐만 아니라 정부의 노력이 수반돼야한다는 얘기다.

 

원전사업과 의료정책은 공공의 영역이자 시민의 안녕과 직결되고 공급자와 수용자 등에 따라 의견이 엇갈릴 수 있는 사안이라는 점에서도 유사한 속성이 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나라 보건의료 정책을 살펴보자. 의사와 환자, 공급자와 수용자 사이의 신뢰 형성을 위해 정부와 지자체 등이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 말이다.

 

지난 3월 ‘통합자원관리시스템’을 구축한다는 서울시의 계획이 알려졌다. 민간자원을 신속히 활용할 수 있도록 전문가 인력풀을 만들어 전산망에 입력하고 연락 한번으로 지원이 가능하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응급환자나 급작스런 재난상황 발생시 인근에 사는 의사, 간호사, 전직 소방관 등에게 호출이 가는 방식이다. 그러나 의료계 반응은 싸늘했다.

 

서울시의사회는 “재난으로 고통 받는 이웃과 응급환자를 돕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관이 나서서 대놓고 민간을 강제하고 관리하겠다는 식의 발상은 용납하기 어렵다”고 성토했다.

 

전국의사총연합은 “지자체가 해야 할 역할과 책임을 반강제적으로 민간인에게 떠넘기려는 몰염치한 발상”이라며 구상안 즉각 폐기를 요구했다. 긍정적 취지를 지녔음에도 사전협의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일방향식 행정과 통보가 의사들의 분노를 부른 것이다.

 

최근 정부나 지자체, 정치권, 공공기관에서 쏟아내는 의료분야 정책 및 사업의 ‘프레임’에도 우려스러운 부분이 있다.

 

서울시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진료비 확인 제도’, ‘진료불성실 상담서비스’, 최근 서울지방경찰청의 ‘의료전담수사팀’ 신설 등이 그 예다.

 

물론 일반 시민과 환자 권익을 보호한다는 취지로 나온 제도들이다. 반면, 이 제도들의 프레임이 마치 의료인을 믿지 못할 대상 또는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대한의사협회는 “대다수의 병원에서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것으로 호도해 오히려 의사-환자, 환자-병원 간 신뢰를 깨뜨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아무리 좋은 취지의 정책이나 제도일지라도, 독단적인 행정은 더 큰 오해와 갈등을 일으킨다. 충분한 협의와 타당성을 검증하지 못한 정책은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한다.

 

단순히 머릿수나 권력을 앞세워 제도를 추진할게 아니라 민주적 기제를 작동시켜야 한다. 정책이나 제도를 기획하는 단계부터 의료인을 참여시켜 타당성을 검토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공론화 과정이 이뤄져야 한다.

 

서울시의사회 김숙희 회장은 최근 서울시 관계자를 만나 보건의료정책을 기획할 때 의사들을 참여시켜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보건의료 분야에서 이뤄지는 정치와 행정이 의사와 환자 간 오해나 불신을 조장한다면, 정책이나 제도 역시 추진력을 잃고 말 것이다. 의사와 환자 간의 신뢰 구축은 정부와 지자체의 노력이 동반될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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