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고관절 질환 명의(名醫)이자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던 조윤제 경희의료원 정형외과 교수[사진]가 올해 초 퇴임한 후 강원도 속초보광병원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남은 여생을 경희의료원에서 제자 양성 및 연구에 바치려 했던 그의 계획은 예기치 못한 '의료대란' 파고 앞에 갑작스럽게 바뀌었다. 동해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속초에서 지역주민들에게 고품질 진료 제공 등 새로운 소명을 품고 '인생 2막'을 새롭게 시작하고 있다.[편집자주]
"의료대란 장기화, 지방병원 제자 부탁으로 인생 항로 바뀌다"
속초보광병원 조윤제 명예원장의 속초행은 단순한 은퇴 후 거취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원래 경희의료원에 명예교수로 남아 5년간 더 후학 양성과 연구에 매진할 생각이었다.
수 많은 병원들 '러브콜'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학의 책무를 우선했다. 하지만 지난해 2월부터 대한민국 의료계를 뒤흔든 '의료대란'은 굳건한 결심을 흔들었다.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나면서 대학병원 기능이 마비됐습니다. 수술은 커녕 연구논문 한 편 쓰기조차 어려웠어요. 제가 의료원에 남아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기능을 잃은 대학병원에서 무력감을 느끼던 그에게 속초의 한 제자가 손을 내밀었다. "도와달라"는 간곡한 요청에 조 명예원장은 고민에 빠졌다.
당장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의료대란 상황에서, 그가 지향했던 제자 양성과 연구라는 목표는 요원해 보였다. 결국 그는 30년 넘게 몸담았던 경희의료원을 떠나 속초행을 택했다.
"그 일이 없었더라면 아마 계속 서울에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지역의료 발전에 일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잘한 결정이라고 확신합니다."
조 명예원장은 속초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매주 주말 서울을 오가며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지만 평일에는 오롯이 속초 생활에 집중하며 새로운 의료환경에 적응하고 있다.
"속초보광병원이 지역거점병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
속초보광병원에서 조 명예원장은 주로 고관절과 무릎 질환을 진료한다. 초반에는 경희의료원에서 진료를 했던 환자들이 전국에서 찾아왔다.
"전라도, 경상도에서도 2시간 반을 달려 오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서울보다 접근성이 떨어지니 점차 줄어들긴 하지만 여전히 먼 곳에서 찾아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제는 점차 현지 환자 비중이 늘고 있다. 농번기인 이 시즌에는 환자들이 적어 다소 한가로운 편이라고 웃으며 말한다.
"경희의료원에서 수술을 해드렸던 강릉, 속초 지역 환자분들이 저를 찾아와 '와주셔서 고맙다'고 인사할 때면 큰 기쁨과 보람을 느낍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치료받을 수 있으니까요."
조 교수는 속초보광병원이 아직 규모는 작지만 지역 거점 병원으로 성장할 잠재력이 충분하다고 봤다. 의료기기와 시설 등을 차츰 보완해 가며 환자들 요구에 맞춰 간다면 충분히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저의 합류가 병원 성장 모티브가 되길 바랍니다. 병원 경영진 노력과 투자가 뒷받침된다면 3차 병원 수준으로 성장하고 지역의료의 든든한 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역지사지 마음으로 의료 사각지대 놓인 지역주민들 돕겠다"
조윤제 명예원장은 이곳에서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실천 중이다. 환자 입장에서 생각하고, 환자가 편안하게 치료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특히 "인공관절 수술처럼 환자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치료에서 역지사지가 필요하다"면서 "환자가 수술 후 스트레스 받지 않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자신이 가르쳤던 경희의료원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몸소 실천했다. '환자 입장에서 생각하고, 환자를 위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마음만 먹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술기를 익히며, 늘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그는 당부했다.
의료대란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후배 전공의들에게 조 명예원장은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말고 꾸준히 노력하라"고 조언했다.
속초에서 그는 '인생 2막'을 시작하며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당장은 바닷가 한 번 제대로 나가보지 못할 정도로 진료에 집중하고 있지만, 여유가 생기면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다.
그는 "관공서와 협력해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분들을 직접 찾아내고, 그분들에게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싶다. 할 줄 아는 게 이 것 밖에 없으니 남은 인생을 이 일에 바치고 싶다"고 소박한 바람을 피력했다.
수 십 년 쌓아온 의술을 바탕으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자신을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최선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그의 다짐은 동해바다 잔잔한 파도처럼 묵직하게 다가왔다.